다시 파울로 프레이리

 

 

<파울로 프레이리 신학·영성·신학>, 제임스 D. 카릴로, 드릭 보이드 지음, 최종수 옮김, 신앙과지성사, 2021

내가 감청 시절이니 1980년 전후가 되겠다. 암울하고 잔혹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지배했던 시대다. 웬만한 책은 다 ‘판금’ 처분을 받았다. 비판적이거나 정권에 도전하는 내용들의 책들은 다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혔고 판금 처분을 받은 책들은 서점판매와 유통이 불가했다. 만약 어길시 치도곤이를 치렀고 심하면 감옥행이었다. 판금 처분을 받았던 책들 가운데 이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하여 얼마나 좋은 책들이 많았었나? 소위 ‘판금’ 책들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던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었나? 그러므로 정권의 통치 차원에서 행했던 판금 정책은 오히려 선을 구축하게 한 악화의 정책이었으리라.

그중의 한 책이 있었다. “페다고지, 페다고지”란 말이 우리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다. 마치 ‘페다고지’를 보지 못한 사람은 대화에 낄 수도 없고, 약간 저급한 지식을 취급을 받았었다. 순식간에 영문판 복사본이 나돌았다. 하여, 나도 저급한 지식인 청년 취급을 받지 않으려고 복사본을 몰래 구입했다. 그런데 영어를 잘 못하는 까막눈인 나는 답답할 수밖에. 그런데도 아닌 척하면서 다른 책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가지고 다녔다. 만남의 장소도, 집회 장소에도 그랬다. 제일 위에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피억압자의 교육학(Pedagogy of the Oppressed』를 올려놓고 폼을 잡았던 웃픈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미국감리교회(UMC)에서 은퇴하시고 틈만 나면 산속을 헤매면서 버섯을 찾아다니시고 그 무수한 가짓수의 버섯들을 공부하려 애쓰시는 최종수 목사님이 내게 불쑥 찾아오셨다 (물론 최 목사님은 한국 방문 중에는 꼭 신앙과지성사를 찾으셨다.) 오시자마자 하시는 말씀, “최 장로님, 내가 펜실베이니아 대학 구내 서점에서 너무나 반갑게 만난 책이에요. 이 책 번역할 테니 무조건 출판해 보세요.” 잊었던 파울로 프레이리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감청 시절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것이 아닌가? ‘페다고지’를 들고 다니며 억압의 역사와 한 맺힌 사건들을 많이 해소했지 않았던가? “그럼요, 목사님! 얼른 가셔서 번역하세요. 저는 중개사를 통해서 이 책 저작권 신청부터 해 놓을게요.”

80세가 다 되시는 노구를 달래며 최 목사님은 2021년초 겨울부터 여름이 찾아올 때까지 긴 시간을 파울로 프레이리와 씨름했다. 명저를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고행길인가? 그리고 나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네덜란드의 원서 출판사와 씨름했다. 로열티가 너무 비쌌다. 그래도 어찌하랴 청년 시절 파울로 프레이리 선생님을 앞세워 품잡고 다닌 죄려니. 그렇게 6개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원고가 도착했고, ‘신앙과지성사’가 3개월 편집 작업하여 정말 귀중한 책 『Paulo Freire, His Faith, Spirituality, and Theology』가 한국에서도 탄생하게 되었다.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세계적인 교육철학자요, 『페다고지』의 저자로만 알려져 왔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만났고, 성서를 통해 예수의 영성을 깨닫고 체험했으며, 그것을 근간으로 세계적인 교육학의 대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숨겨진 일 비슷하게 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하여, 내가 이 책을 고집스럽게 앞뒤 계산도 하지 않고 무조건 이 험악한 한국의 출판시장에 내놓으려고 하는 큰 뜻은 『페다고지』는 ‘예수의 교육학’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가톨릭 신자였으나 파울로 프레이리는 교육학의 대가이기 이전에 민중과 함께 민중과 나란히 했던 크리스천 영성가란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나의 이런 갸륵함이 이 책 속에 숨어있다.

이 책이 출간된다는 소리에 남영숙 목사님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한국에서 프레이리를 가장 잘 소화하고 있는 유범상 박사(한국방송통신대 교수)를 소개하고 추천사를 쓰게 했다. 내친김에 나도 문재인 대통령이 그의 글에 감탄하여 직접 편지를 보냈다는 부산 샘터교회 안중덕 목사(교육학 박사)에게 추천사를 부탁하였다. 이 책이 호평받으려니 넘어져도 풀밭이라 했던가? 남미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할 무렵 프레이리 박사의 강연을 브라질에서 듣고 아직도 그 영향을 받아 『엘 까미난떼』를 쓴 우리 출판사의 필자인 홍인식 박사가 자천하며 추천사를 집필해 주어 더욱 멋진 책이 되었다.

이 책이 더욱 빛나는 것은 프레이리 박사의 부인인 니타(Nita)박사의 머리말이다. 그녀는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그를 잃은 아픔이 자신에게 진정한 기쁨으로 다가오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면서 프레이리의 삶과 사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프레이리의 외면당했던 그의 믿음과 영성이 이 세상에서 가난과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할 것을 소망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출판되는 날이 프레이리의 탄생 100주년(1921.9.19.)이 되는 날이라서 더욱 기쁘다. 독자들과 이 좋은 책을 함께 나누기를 염원하면서 핵심 목차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1. 영성과 파울로 프레이리
2. 부활체험: 민중에로의 회심
3. 희망, 역사, 그리고 유토피아
4. “사랑의 우물”에 기반을 둔 사람
5. 진정성 있는 삶을 산 겸손의 사람
6. 해방신학에 남긴 프레이리의 발자취

최병천 장로 (신앙과지성사 대표)

선교사 사애리시와 선교사 지네트 월터

선교사 사애리시와 선교사 지네트 월터

<이야기 사애리시> 임연철 지음, 신앙과지성사, 2020
<지네트 월터 이야기> 임연철 지음, 신앙과지성사, 2021

민족의 보배요, 감리교회의 자랑인 유관순 열사의 첫 스승은 선교사 사애리시이고, 그의 죽음을 거두어 준 마지막 스승은 선교사 지네트 월터인데, 우리는 이런 중요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분의 삶과 신앙을 다룬 두 책이 모두 2020년과 2021년 세종도서에 선정되어 신앙과지성사의 발행인으로서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두 책을 소개한다. 이는 우리 한국감리교회와 한국교회에 안겨준 경사가 되었다. 이분들이 없었더라면 유관순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하에 이 두 책을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1. 유관순 열사의 첫 스승, 『이야기 사애리시』

사애리시(Alice H. Sharp, 1871-1972)는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푸른 눈의 여성이다. 39년을 한국에서 헌신했지만 사애리시는 겨우 한국교회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잊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결코 잊혀져선 안 되는 인물이다. 올해 순국 100주년이 되는 유관순 열사는 그의 손에 이끌려 공주 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했다. 우리 독립운동의 아이콘인 유관순 열사가 사애리시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떤 운명적인 삶을 살게 되었을까?

사애리시는 일제 치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공주영명학교를 비롯해 여학교 9곳, 유치원 7곳을 설립했다. 가마와 말을 타고 충청도 구석구석을 다니며 세운 교회도 100여 곳이 넘는다. 이 책은 사애리시의 열정적 삶의 기록이다. 인간적인 아픔과 고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방인으로 한국을 위해 이국땅의 민초들과 더불어 살아간 고귀한 증언이다. 평생 언론인의 삶을 산 저자(임연철)는 미국 드루대 아카이브에서 3개월 동안 자료를 뒤졌고 그녀의 캐나다 생가까지 발로 뛰면서 생동감 있게 책을 엮었다. 2020년 정부는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2.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마지막 스승, 『지네트 월터 이야기』

지네트 월터(1885-1977)는 1911년 이화학당에 대학과정이 개설될 때 내한, 1926년까지 영어와 체육 교사로 활동한 교육선교사다. 그녀가 봉사한 15년은 한국이 국권을 상실한 이듬해부터 1919년 3.1 운동으로 독립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주인공은 교사와 학당장 대리(1919-20), 학당장(1921-22)으로서 그 현장을 지켜보며 한민족과 아픔을 함께한 인물이다. 그녀는 특히 1920년 9월 28일 제자 유관순이 옥중 순국하자 서대문 형무소에서 직접 시신을 인수해 학교에 안치한 후 몸소 수의를 입히고 이튿날 장례식과 이태원 공동묘지 안장까지 주도함으로써 유관순의 마지막 스승이 되었다.

월터 학당장은 3.1운동 당시 연행되고 구속됐다 풀려난 학생 12명이 일경으로부터 당한 고문 증언을 영문 보고서로 작성, 미국 선교본부에 보냄으로써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최근의 ‘코로나 19’처럼 대유행을 할 때는 쓰러진 학생들의 체온을 재고 해열제를 먹여 독감의 희생자가 없도록 조치하는 등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모범을 보였다.

저자는 주인공의 전기를 쓰기 위해 2019년 미국 드루대(뉴저지주) 감리교문서보관소에서 장기간 연구하며 새로운 문헌과 사진 수백 점을 찾아내 전기에 반영했다. 또한, 캔자스주에 사는 후손을 찾아내고 주인공이 살았던 콜로라도주의 고가(古家)를 현지 조사해 집안에 보존되어 있는 앨범에서 알려지지 않은 100여 년 전 사진 수십 점을 전기에 소개했다. 이 같은 저자의 노력으로 유관순 열사의 순국 이후 과정이 정확히 밝혀졌으며 문헌과 사진을 통해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과 사회상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두 책을 쓴 임연철 박사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고교 시절부터 서울로 유학와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할머니를 전도한 서양선교사 사애리시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성장했다. 알렉스 헤일리가 『뿌리』를 썼듯이 할머니와 같이 살던 시절을 유추하며 70살이 지난 노년에 ‘신앙적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가 이 책으로 열매 맺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를 전도한 분이 자신의 할머니도 전도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 그의 기자 근성을 자극했고 뜻깊은 전기 작가가 되게 했다. 중앙일보(1974-1978)에서 기자를 시작해 동아일보(1978-2007)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고 국립극장장으로도 일했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1972)했고 성균관대학교에서 공연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대, 숙명여대 등에서 ‘전시공연마케팅’을 강의했으며, 『예술경영』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이 두 책이 널리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최병천 장로 (신앙과지성사 대표)

 

어린이신학

어린이신학

<어린이신학>, 이신건 지음, 신앙과지성사, 2017

2020년 대한민국을 경악케 했던 사건 중의 하나가 서울특별시 양천구에서 발생한 아동 학대 살인 사건, ‘정인이 사건’이다. 정인이 사건은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한 당시 8개월의 여자아이를 입양모 장하영과 입양부 안성은이 장기간 심하게 학대하여 16개월이 되었을 때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또한 설 연휴 직전인 2월 10일에는 경북 구미의 빌라에서 2살배기 여아가 숨진 채 발견됐다. 친모는 아이를 빌라에 남겨둔 채 이사를 가버려 결국 아이가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살인)로 구속됐다. 발견 당시 아이의 사체의 부패가 상당히 진행돼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10살 조카를 학대해 숨지게 한 이모 내외가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조카가 욕조에 빠졌다고 119에 신고한 이들은 실제로는 역할 분담까지 해가며 물고문 수준으로 조카를 학대한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이러한 아동 학대 사건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1960년부터 대한민국의 아동 학대 사건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위 사건 이외에도 2010년 이후의 아동 학대 사건만 살펴봐도 서울 광진구 구의동 어머니 살해 사건 (2011년), 울산 울주군 여아 학대 사망 사건 (2011년~ 2013년), 칠곡 계모 아동 학대 살인 사건 (2013년), 울산 입양아동 학대 사망 사건 (2014년), 인천 송도국제도시 어린이집 아동 폭행 사건 (2015년), 인천 학대 여아 탈출 사건 (2015년), 부천 초등학생 토막살인 사건 (2012년~ 2015년), 부천 여중생 백골 살인 사건 (2015년~ 2016년), 평택 아동 살해 암매장 사건 (2013년~ 2016년), 청주 아동학대 암매장 사건 (2011년~ 2016년), 고준희 양 살인 사건 (2017년) 등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다양해지고 그 수법도 악랄해져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동 학대 사건은 단순히 어린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아동 인권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더하다. 예를 들면 정인이 사건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보도돼 전국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아동을 향한 학대와 범죄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정인이 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들이 소위 독실한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순진무구하고 또한 방어 능력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 무참하게 학대받고 살해되는 상황에서 다시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오래전(1997년)에 발간되었지만 신앙과지성사가 증보판으로 다시 출판된 이신건 저 『어린이 신학』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 신학』은 서울신학대학교 은퇴 교수 이신건 교수가 1997년 처음으로 발간한 책이다. 이 교수는 10년 가까이 해직 교수로서 살아가는 기간에 이 책을 저술한다. 어린이 신학은 어떤 책인가? 어린이 신학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소개한다. 이 책은 어린이들이 거의 없는 교회학교의 현실에서 한 번쯤 공동으로 읽고 성찰해야 하는 책이다.

약하고 무능한 하나님과 신학적 대안!

오랫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의 투사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무한히 전능한 존재로 만들고 신앙해 왔다. 가부장적, 제국주의적인 문명 속에 형성된 구약성서에도 이런 하나님의 모습이 적잖게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낮추신 하나님이요, 스스로 높아지려는 권세가들과 지배자들을 철저히 전복하시는 혁명의 하나님이다. 무엇보다 “오직 어린이 같은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회에서 무시와 학대를 받아온 가장 연약한 인간인 어린이를 어른의 중심에 세우시고 어른보다 더 높이신 예수님의 행동, 그리고 스스로 어린이처럼 무력하고 무능하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은 바로 어린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이중적인 폭력구조(힘센 자와 남성의 폭력)의 극복을 위한 대안

어린이 신학(어린이 하나님의 형상)이 어린이 학대에서 보이는 이중적인 폭력구조(힘센 자와 남성의 폭력)의 극복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신학적 전제가 가능할까? 세상 사람들도 이제는 지배와 착취, 차별과 학대를 점점 더 미워하며,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고 실현해 나가고 있다. 하물며 연약하고 온유한 모습을 통해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세상을 전복한 예수님, 약자를 끌어안고 그들의 편을 든 예수님을 믿는 교회는 얼마나 더욱 그리해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과거에 폭력적인 남성과 어른, 지배적인 권력자가 신봉한 폭력과 지배의 하나님을 과감히 버리고, 이제는 섬김과 사귐의 하나님을 선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린이 하나님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가장 적합하고 절실한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

어린이 신학과 코로나 국면의 교회

예수님처럼 교회는 세상, 특히 세상에서 가장 멸시와 학대, 고통을 받는 자들의 편에 다가가서 그들을 섬기는 온유한 교회, 어린이와 같은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아직도 교회의 이익과 낡은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서만 전전긍긍하는 교회, 세상을 섬기기보다는 스스로 세상보다 더 높아지려는 교만한 교회는 세상의 소망과 빛이 될 수 없으며, 변화의 누룩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부패의 세균이 될 것이다. 코로나19가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오만한 인간에 대한 일종의 채찍이라면, 동시에 교회를 내리치는 경종과 회개의 채찍이기도 하다. 건물 숭배, 인물 숭배,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예배, 실천과 따름과 나눔이 없는 교회로 하여금 묶은 관행을 끊어내고 완전히 새롭게 탈출(출발)하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이다. 어린이 신학책을 통하여 어린이와 같은 하나님을 재발견할 때, 비로소 새로운 깨달음과 실천도 가능해질 것이다.

놀이하는 예수

어린이 신학은 어린이 예수라는 개념을 통하여 놀이하는 삶을 그 특징 중의 하나로 제안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엄숙한 신앙을 강조해 왔다. 신앙은 재미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요즘과 같이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놀이하는 어린이 예수’에 대한 소개는 매우 획기적이다. 어린이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의 가까움과 현존을 증언하고 실천한 예수님은 엄숙한 동물 제사와 거래로 얼룩진 타락한 성전 예배 대신에 일상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운 잔치와 열린 사귐, 즐거운 놀이를 강조한다. 어린이 신학은 오직 어린이와 같은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아무런 숨김과 위선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춤과 노래, 노래로 맛보고 즐길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오늘날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를 위해서도 놀이의 신학은 시급히 재발견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어린이 신학과 성령론

어린이다운 성령 경험은 마치 온유한 비둘기처럼 우리에게 조용하게, 온유하게 강림하는 성령 경험을 강조한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폭력적인 현실의 전복을 힘차게 노래했으며, 성전에 들어간 예수님은 성령 강림을 통한 현실의 변혁을 강하게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린 아기를 계속 탄생시키시는 주된 이유는 어른이 만든 부패하고 굳은 세상을 다시 갈아엎기 위해서이다.

이신건의 『어린이 신학』은 침체된 한국교회에 어린이 같은 활력과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해 주는 선물과 같은 책이다.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사랑하며 춤추라

 

사랑하며 춤추라

<사랑하며 춤추라>, 원혜영, 김장생 외, 신앙과지성사, 2018

미국에서 한인교회 목회를 성실하게 한 사람으로 소문난 김정호 목사가 태평양을 건너와 반갑게 만날 때마다 단골 밥상의 굴비처럼 귀하게 나눈 이야기가 이 책의 기획 단초가 되었다. 김 목사는 미군 부대가 유독 많았던 의정부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 이민 갔던 1.5세인데 자신은 선생님들을 잘 만나서 나름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지금은 목회에 지치고 삶의 의미가 무너져 내려도 찾아갈 선생님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김 목사는 목회 초년병 시절 곽노순, 홍근수 두 분의 목사님을 만나서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가르침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 너무나 큰 재산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뵙지는 못했지만 장인어른(난지도의 성자 황광은 목사)의 예수처럼 살아오신 짧은 생애에도 큰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김 목사의 진지한 “어른이 그리운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되풀이 되었을 때 광현교회 서호석 목사가 제안했다. “그럼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으면 어떨까?” 그게 좋겠다면서 두 사람은 크게 공감을 표하고 갔지만, 숙제는 내게 떨어졌다.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하다가 “예수의 삶을 살아낸 어른들의 이야기”를 부제로 하여 내 책상 앞에 그려진 지도는 다음과 같다.

대천덕 – 예수원에 연락하여 큰아드님에게 글을 부탁했는데, 자신은 한국말에 미숙하고 수제자 격인 양혜원 선생을 추천하여 집필.
장기려 – 인척이 없으므로 저서를 낸 지강유철 선생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집필을 의뢰함.
원경선 – 장남인 원혜영 의원에게 부탁. 쉴틈 없이 바쁘다는 것을 간신히 집필 부탁함.
김용기 – 손자인 김장생 교수에게 부탁하여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집필토록 함.
조아라 – 딸과 같은 YWCA연맹 사무총장 유성희 박사를 간곡히 청하여 집필토록 함.
나애시덕 – 양아들 격인 최종수 목사님에게 집필토록 함.
황광은 – 사위인 김정호 목사가 집필. 서문까지 씀.
권정생 – 친구인 종로서적 사장을 지낸 이철지 장로님이 고령에도 불구 투혼의 글솜씨 발휘함.
이현필 – 한겨레신문 조현 기자님께 정성을 다해 집필 부탁함.
마지막으로 전체 발문을 김기석 목사께서 흔쾌히 집필하기로 함.

워낙 유명하신 어른들의 글을 한군데 모아놓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또 그 의미를 더하려고 그분들과 가까이에 있는 분들을 집필자로 삼으려니 더욱 그러했다. 6개월이 넘게 씨름하여 원고를 받아냈다. 아홉 분의 훌륭한 어른들의 이야기가 한 그릇에 담겨 책으로 나오니 정말 보람이 컸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 했던 분들의 삶을 담았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실종된 채 겨우 교회 다니는 것으로 버티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책이다. 아홉 어른의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하는 책을 탄생시킨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김정호 목사의 서문대로 어느새 우리가 바라보고 살았던 어른들이 너무 많이 떠나셨다. 그러던 사이 뒤따라오던 후배들이 어른 노릇 제대로 못 하는 우리 세대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 어른 노릇은 감당하지 못하지만, 이 책을 세상에 펴냄으로 우리를 따라오는 세대들에게 오늘의 우리를 가능하게 하신 어른들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소중한 책이다.

김기석 목사의 발문 마지막 부분이다. “세상이 어둡다.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어른들의 삶의 내력에 귀 기울이다 보면 희망이 있느냐는 물음 자체가 죄스럽게 여겨진다. 그들은 희망에 관해 묻지 않고 희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우리 앞에 별처럼 빛나는 존재로 우뚝 서 있다.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 모름지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존재들이라면, 이들처럼 한번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서호석 목사와 함께 김정호 목사가 시무하는 뉴욕의 훌러싱교회로 갔다. 얼마나 많이 팔릴지는 하늘에 맡긴 채 귀한 출판기념회가 먼 곳에서 열렸다. 2018년 가을이었다. 우리 세 사람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야기했던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책으로 엮어진 것이다.

서평을 맡으신 조영준 목사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목이 메어서 제대로 말씀을 전달하지 못하셨다. 이렇게 좋은 책이 나왔으니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교회마다 이웃마다 읽고 나누었으면 참 좋으련만.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대관령 숲에서 맞는 새벽

 

대관령 숲에서 맞는 새벽

(<대관령 숲에서 맞는 새벽>, 박흥규 목사 고희기념문집, 신앙과지성사, 2008)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생각나는 분이다. 30여 년을 농촌교회에서 목회하며 60의 나이에 자원은퇴를 하고 본격적으로 대관령으로 나무를 심으며 수목신앙의 꿈을 키우시던 박흥규 목사님은 꽃피는 봄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분이다. 벌써 박 목사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 7년이 된다.

박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8년 무렵이고 나에게는 감청시절이니 무척 오래되었다. 당시 나는 감청운동의 연장 선상에서 생활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고 그래서 사회과학 출판사였던 형성사에서 편집일을 보고 있었다. ‘감청회보’를 일간신문 크기로 격월로 발행했던 경험을 살려 출판사에 취직을 하면서 책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때 박 목사님은 40대 초반으로 김포 월곳교회를 담임했다. 공덕교회, 은강교회, 약수형제교회, 아현교회, 아현중앙교회가 감청운동의 베이스캠프였고 나는 공덕교회에서 청년부 후배들을 지도하는 교사의 입장으로 박 목사님을 찾아갔다. 학내 학생운동이 봉쇄되어 교단청년운동으로 청년 정신의 명맥을 이어가던 때다. 공덕교회 청년 30여 명을 데리고 열흘간 농촌봉사를 할 터이니 장소제공과 울타리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젊어서나 노인이 되어서나 친절한 구석이라곤 없고 표정부터도 쌀쌀했던 박 목사님은 청년들이 시골에 내려와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대상이었던 문제들도 잘 해결해 주셨지만, 저녁 늦은 토론시간에 오셔서는 청년들에게 핀잔에 가까운 말씀을 하곤 하셨다. “니들, 여기 왜 왔나?” “무슨 공부들 하냐?” “농촌교회의 현실을 말해 보라.” 등등의 말씀을 겉으로는 퉁명스러웠지만 속으로는 큰 사랑을 품고 말씀하시곤 했다.

사근사근하지 않던 박 목사님과의 첫 만남 이후 나와 박 목사님은 긴 시간을 (한 20여 년) 만나지 못하다가 송병구 목사가 독일 복흠교회에서 목회할 때 독일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10여 명이 보름간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박 목사님이 제일 어른이셨고 17년 차이가 나지만 다음이 나라서, 그와 룸메이트가 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그때 함께했던 일행들도 모두 박 목사님과 거리 두기를 하곤 했다. 아침저녁으로 마주칠 때면 “야, 너 요새 무슨 책 보냐?” “공부 안 하고도 입질 잘하느냐?” “돈 벌려고 목회하냐?” 등등 까칠한 질문에 시달리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는데, 나는 오지게도 보름을 한방 쓰면서 박 목사님의 까칠한 질문들을 요리조리 피해 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내가 느낀 것은 박 목사님이 정말 책을 사랑하고 공부를 많이 하셨다는 점이었다. 서양철학사에서부터 중세와 기독교 그리고 현대신학에 이르기까지 정말 박식한 면모를 지닌 분임을, 책벌레이심을 알게 되었다.

독일여행을 다녀온 후 박 목사님과 매우 가까워졌다. 인간적인 사귐이 있고 난 후부터 박 목사님은 동생 같은 나를 매우 존중해 주었고, 이 시대에 외롭게 출판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러면서 박 목사님은 나와 책을 통로로 삼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가 대관령 숲속에서 주경야독했던 책들의 감회를 내게 전했다. 그래서 박 목사님 덕분에 나에게도 책에 대한 안목이 넓어졌고 나름 기획능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대관령 숲에서 맞는 새벽>, 이 책은 책벌레였던 박 목사님이 고희를 기념하기 위해 출판한 책으로 현재 우리 출판사에 달랑 한 권 남아있다.

“모든 것은 변화되고 있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머리글 제목으로 박 목사님은 자연과 영생의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번 경험했던 일들은 내 안에 존재하며, 영원한 과정에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 책에서 대관령 산 생활을 기록한 일기와 관심사였던 수목신앙(樹木信仰)에 대하여 제1부를 정리했고, 제2부는 가까이 지내던 동료와 후배 16인이 인간 박흥규에 대하여 쓴 글을 모았다. 이 책 권두 대담의 진행과 정리를 내가 맡아서 박흥규 목사님의 살아온 과정을 서술해 드린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대관령 숲속에서 끊임없이 성찰하며 살던 사람 박흥규 목사, 그의 빈자리가 내겐 너무 크고 넓다. 여린 가슴으로 대범한 척하셨으며, 남들이 슬슬 피하는 가시 같은 이야기로 후배들을 자극하려 했던 순전한 그분의 속내가 오히려 애처롭고도 가슴 아려온다. 이 책을 어루만지며 그가 살던 농막이 있는 대관령 옛길을 얼른 다녀와야 할 터인데… .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함께 사는 기적

 

 

(<함께 사는 기적, 프랑스 떼제와 신한열 수사 이야기>, 신한렬 지음, 신앙과지성사, 2017년)

1.
나도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기적이란 생각을 가끔 한다. 며칠 전 나와 가장 가까운 마나님이 출근길 운전하는 내게 심한 잔소리를 했다. 따로 다니는 게 참 편한데, 몸이 아프신고로 모셔다 드리는 출근길 한 시간이 참 길었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나 이외의 사람에게 받게 되는 스트레스가 참 많다. 그래서인가 우리는 모두 떨어져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었고, 자식이든 친구든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말이 진실하게 들릴 때도 많다. 사랑으로 함께 하는 신앙공동체를 갈망한다며 수없이 기도하건만 교회 생활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런데 함께 사는 기적을 일궈내는 현장이 있다. 휴가를 얻는다면 꼭 한 번쯤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참 예쁘고 아름다운 수도 공동체인데,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떼제다. 유럽의 고풍스럽고 역사성 있는 교회들이 줄줄이 문을 닫아가고 있는 시점에서도 이곳은 세계 각처의 젊은이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오고 한여름에는 텐트 칠 자리도 없을 만큼 하루 3천 명 넘는 인원이 오간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단순하고 소박한 수도공동체인 이곳에 사람들은 왜 그렇게 찾아오는 것일까? 숙소도 여행을 위한 제반 조건도 그리 좋지 않은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 왜 세계의 젊은이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명상하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는 것일까? 이 책과 만나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신앙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

2.
나는 떼제를 두 번 방문했다. 첫 번째는 20여 년 전 감리교연수원 프로그램으로 당시 이면주 목사님이 감리교 중견 목회자 십여 분과 젊은 세대로 나와, 엄일천, 정해선, 김성복, 고인이 된 김영범을 합류시켰다. 떼제는 최소 일주일은 머물 것을 권하지만 우리 일행은 한 닷새쯤 머문 것 같다. 지금은 대개 고인이 되신 목사님들과 젊은 우리는 그곳의 신선한 분위기와 자유로운 규범(하루 세 번 공동예배 외에는 프로그램도 없고 강요하는 것도 없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생활해야 한다)을 좋게 보는 듯하면서도 한국의 심령부흥회 등 한국적 기도원의 분위기에 젖은 나이 드신 목사님들은 적응에 힘들어하셨다.

그런데다 당시 한완상 장로님이 통일부총리가 되어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이려고 하는 때라 그곳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은 대부분 이념논쟁에 시간을 소모하면서, 떼제가 추구하는 정신과 사뭇 반대되는 대화가 우리를 지배했다. 우리 일행은 한국인 수사로 서강대 학생운동의 리더로 민주화 과정에서 죽어간 박종철과 친한 친구이며 그의 죽음에 회의를 느낀 이 책의 저자 신한열 수사(이한열 열사와 이름이 같아 기억하기 좋았으나 아픈 이름이다)를 그곳에서 만났다. 지금은 60이 다된 나이이나 당시 앳된 얼굴로, 유일한 한국인 수사였다. 신 수사는 우리 일행의 양극화된 분위기를 잘 이해하면서 믿는 이들이 어떻게 땅의 소금과 화해의 누룩이 될 수 있는지를 안내했다. 또 떼제가 있어 소비와 경쟁, 분열과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도 세계 곳곳에서 함께 사는 기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3.
나의 두 번째 방문은 존경하는 조화순 목사님을 모시고 갔다. 벌써 한 10년쯤 지난 일이다. 친구 이필완 목사가 동행하면서 조 목사님 시중을 나누어 들었다. 조 목사님 역시 이튿날까지 탐탁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하루 세 번 예배에 설교도 없고 성경 읽고 침묵하고 단순한 노래들을 기타반주에 맞춰 반복하는 것이 싱겁고, 젊은이들이 몰려들지만 구름 같은 것이고 현장성이 없어 문제라고 지적하셨다.

그런데 그 무렵 한국에 가 있던 신 수사의 배려로 3일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을 수사들의 집에 초대하여 극진한 잔치로 환영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알로이스 원장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신 조 목사님을 소개하고, 치하하니 조 목사님의 태도가 바뀌셨다. 또 떼제의 중심으로 예배처소인 ‘화해의 교회’에서 낮 예배가 끝난 후 알로이스 원장 수사가 조 목사님께 무릎을 꿇더니 안수해 달라는 것이 아닌가? 조 목사님도 흥분하셨고 신 수사가 계셨으면 일도 아니련만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내가 통역을 감당했으니, 진땀이 나던 추억이다.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인 통역사 노릇이었다.

기분이 업된 조 목사님은 나더러 언제 그렇게 영어를 했냐 칭찬하시기에 내친김에 이웃어간에 있어 참 아름다운 소도시 끌로네로 모시고 갔다. 조 목사님과 잊을 수 없는 좋은 여행을 했다. 일주일 그곳에 머문 후 우리 일행은 독일로 향하여 존경하는 이영빈 목사님 댁을 방문했다. 김순환 사모님과 이 목사님 세 분이 부둥켜안고 울면서 만났고 헤어졌다. 3일을 함께 지낸 후 이 어른들은 우리 언제 또 만나냐? 하시며 작별하셨는데 이것이 이영빈 목사님과 조화순 목사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4.
신한열 수사의 『함께 사는 기적』, 이 책에서 내가 가장 뜻 깊게 느낀 것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카의 말이 실현된 현장이 떼제라는 점이다. 떼제는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 중 유대인과 독일, 프랑스 전쟁포로들을 보호하면서 로제 수사가 시작하고 세워나간 모든 종교를 초월한 예수 사랑의 집이다. 거기에 그분의 섭리가 계셔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실망과 고뇌에 빠졌던 신한열이 로제와 만난 것은 역사 속에서 함께 사는 기적의 섭리라고 생각하여 큰 울림을 갖는다.

로제는 신한열을 신뢰하여 떼제가 소유할 수 없는(공동체든 개인이든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 형제 중 누군가가 바친 큰 유산을 어떻게 쓰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신한열은 우리 북한 동포를 위해 쓰자고 제안했고 로제가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떼제의 북한 사랑의 손길이 펼쳐져서 두유 공장을 세우고 해마다 많은 양의 쌀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로제의 신뢰를 바탕으로 신한열은 유럽에서 대규모 젊은이 모임을 열고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국과 일본 홍콩과 중국 등 젊은이들과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5.
예수 사랑과 가난의 정신을 배경 삼아 로제 수사가 걸어온 떼제의 여정은 귀중한 것이고, 신한열이 종신서약하고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과정에서의 사랑과 회의와 희망의 이야기가 이 책을 탄생시켰다. 떼제 수사로서 책을 낸다는 것이 쉬운 결심은 아니었지만, 나의 꾸준한 제안을 수용해 준 감사의 산물이다.

이 책을 보면 참 감명 깊은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어느 단체나 새로운 또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는 법. 떼제 역시 신선한 사랑과 화해를 위한 많은 일을 하였으나 팬데믹 시대를 맞아 새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신한열은 다시 2020년 한국으로 돌아왔고 또 다시 한국에서 함께 사는 기적을 일구려고 준비 중이다. 이 책을 다시 천천히 읽으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안내하고 있는 귀한 책이다.

최병천 장로(공덕교회, 출판인)

나는 영생을 믿는다.

나는 영생을 믿는다.

<나는 영생을 믿는다>, 위르겐 몰트만, 이신건 옮김, 신앙과지성사, 2020년

지난 여름 뜨거운 태양을 피해 양평에서 은퇴 후 노년의 후반전을 의미 깊게 사는 이신건 박사의 집을 찾았다. 거실 탁자 위에 독일어 원서 한권이 놓여 있었다. 까막눈인 나는 물을 수 밖에. 그랬더니, <살아있는 영혼의 죽음과 깨어남>이란 제목의 몰트만 선생님의 마지막 저서가 될 것 같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남은 현대신학자의 마지막 책이라?

순간 상당한 의미로 다가 왔다. 이 책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곧장 번역해 달라, 올 연말에 예쁜 책으로 출판해 스터디 셀러로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원조 옥천냉면 할머니 집으로 모시고 가서 일행을 대접했다.

원고가 10월에 도착했다. 나는 책 제목을 과감하게 붙였다. <나는 영생을 믿는다>로! 그러면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팁을 신앙과지성사가 톡톡히 주었다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막상 기독인과 비기독인이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당황하거나, 말문이 막히기 일쑤다. 그러나 이 책 제목처럼 나는 영생을 믿는다고 하면 참 좋은 답이 될 터이다.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편집 작업에 몰두했다. 삶과 죽음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사귐이란 뒷 표지 헤드 타이틀을 찾아내곤 새벽녘에 한동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처형 직전 감방동료들에게 남긴 말, 죽음은 마지막이지만 나에게는 영원한 시작이란 감동적인 문구도 추가했다. 내가 하고도 내가 스스로 감회에 젖었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문학적 표현까지 더했다. “죽음의 순간에는 아마도 새로운 공간이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우리를 부르는 생명의 외침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아 평안히 이별하여라. 그리고 건강하여라” 라는 말까지 찾아냈다.

이 책은  표지 글만 읽어도 죽음에 대한 크리스천의 자긍심을 갖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굴지의 언론 세군데서 동시 서평을 해주며 근래 보기 드문 책이 나왔다고 극찬했다. 책은 3주 만에 초판이 다 떨어졌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역자 이신건 박사는 말한다. 오늘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시는 분들과 실제로 죽음의 벼랑에 내몰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미안하다고. 그러나 몇 년 전 부인을 먼저 보내고 95세의 노년에 죽음과 생명과 영생에 관해 깊이 묵상하며 쓰신 선생님의 글을 옮기며 마음이 많이 아려왔다고 고백했다.

어제는 참 가기 싫은 곳을 다녀왔다. 평소 이 시대 마지막 등불 같은 출판인이라며 나를 격려해 주던 친구 루터교의 주대범 장로의 빈소였다. 정의감 넘치고 인정 많고 음악가이고 목수였던 다재다능했던 친구가 갑자기 쓰러져 눈을 뜨지 못하고 세상 소풍 길을 마감했다. 소식을 접한 한 주간 동안 참 우울하고 슬펐다. 한 두어 달 쯤 되었나? 주 장로는 내게 전화해서 아쉬운 부탁을 했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교우를 부탁하며 재능 있는 친구인데 생활이 어려우니 출판사에서 일 좀 시켜 달란다.

주 장로의 하소연을 들으며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주 장로의 넓은 품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빈소를 나와 한 시간 쯤을 터덜터덜 걸었다. 주 장로는 많은 사랑을 남기고 영생의 길을 먼저 갔다. 걷는 내내 그가 예수살기 모임에서 피아노치며 노래 부르던 모습만이 아른거렸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친구 주 장로를 먼저 보내며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만든 이 책이 더욱 더 깊게 마음속에 다가온다.

최병천 장로 (공덕교회, 출판인)

 

휴심정 뉴스(조현 기자)–미국 브루더호프 공동체 생활 15년…푸른 초원위 사랑·배려의 삶 있더라 ​

반하트-스포츠맨십의 전도사

스포츠를 통한 복음 전도사,

반하트

 

이가람 경상국립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

 

 

한국 스포츠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에게 반하트는 익숙한 이름이다. 필자 역시 YMCA와 스포츠의 연계과정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반하트라는 이름을 매우 많이 접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의 이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조우하면서 잠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반하트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요람인 ​YMCA가 최초로 초빙한 한 체육지도자로서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에 근대 스포츠가 발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체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전수한 농구와 배구 등의 각종 근대 스포츠는 한국 청년들이 일본과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YMCA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한국인들이 잠시나마 울분을 표출할 수 있게 해 주는 원천이었다. YMCA에서 근대적인 스포츠 활동을 배운 한국 청년들이 운동장에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일본과 대결하고 일시적인 승리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YMCA는 국제적인 기독교 단체로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일본의 통제와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였고, 그곳에서 반하트는 한국인들에게 근대 스포츠를 직접 가르치고 전수하면서 한국 사회의 근대 스포츠를 통한 문명화에 앞장섰다. 반하트는 근대화된 신체 문화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 YMCA에 체육지도자로서 한국 청년들에게 신체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스포츠를 통해 젊은이들의 남성다움을 고취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스포츠는 신체적인 언어이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들은 새로운 문화와 언어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스포츠는 서양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을 친화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한국 야구의 시발점이 YMCA 야구단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예증한다. 야구는 한국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낯선 교회로 걸어가는 복음 티켓으로 이용되었다.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다양한 근대 스포츠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 향유되고 있는 주된 스포츠가 되었다. 농구와 배구도 반하트가 주축이 되어 YMCA를 통해 한국에 도입되었고, 현재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 문화로 자리잡았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교회와 스포츠가 결속된 연유는 바로 스포츠가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초의 YMCA 체육지도자였던 반하트의 생애를 정리한 책 『반하트: 스포츠맨십의 전도사』는 한국 교회사와 근대 스포츠의 결속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선교사들에 관한 연구는 많이 축적되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건너온 수많은 선교사들이 펼친 숨은 사역의 발자취가 연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 한 분야가 바로 YMCA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문명화와 복음적 사명을 실천한 선교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스포츠를 통한 문명화와 전도를 이룩한 미국YMCA 선교사들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절실하다. 미국YMCA는 초창기 영국YMCA와는 달리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기독교 확장을 위한 핵심적인 매개체로 활용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YMCA 체육 사업을 주도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저서는 YMCA 선교사들의 역사적 연구를 위한 새로운 지평과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저술한 임연철 박사는 반하트의 삶을 4부로 구성하고 있다. 1부 "체육선교사 준비기"에서는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 반하트의 성장과 결혼 과정에 대한 삶을 기록하고 있다. 반하트는 어린 시절부터 야성적인 에너지를 소유했다는 점에서 체육선교사가 되기 위한 선천적인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대학 시절에 농구팀의 선수와 대학 YMCA의 위원회를 경험하며 YMCA 체육지도자로 일할 수 있는, 영적∙신체적∙정신적으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농구는 YMCA가 발명한 스포츠 문화이다. 반하트가 학창 시절 YMCA가 창안한 스포츠 문화를 기반으로 스포츠 복음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가슴 속에 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2부에서는 YMCA 체육부 지도자로 내한한 반하트의 초창기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1916년은 한국 스포츠사에서 중대한 해이다. YMCA 가 한국 최초로 실내체육관을 개장하며 동시에 본격적으로 스포츠를 보급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로, 이를 통해 스포츠의 대중화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체육 교육을 전담할 책임자 반하트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반하트는 한국에 올 때 짐 속에 "농구공 1개, 야구공과 포수용 글러브 각 1개, 배구공 1개, 그리고 치료가 불가능한 스포츠 사랑 정신"을 함께 가지고 왔다.(85쪽) 스포츠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YMCA 지도자로서 내한 이후에 빠르게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동시에 거의 모든 운동 종목을 직접 코치하고 운영함으로써 체육 활동의 발전과 보급에 앞장섰다.

 

반하트를 통해 한국인들은 강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체육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반하트는 스포츠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활용되는 것을 넘어 스포츠를 사회적 개혁의 매개체로 인식했다. 그는 공정한 규칙 아래 건전하고 질서 있는 행동을 추구하는 스포츠 활동을 통해 문명화된 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다.(121~123쪽) 두 아들을 잃는 역경 속에서도 그는 청소년교육, 실업교육, 농촌교육 등에 헌신하며 한국 사회의 개선과 진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3부 "한국 봉사 후반기(1930~1940)"에서 저자는 서울YMCA 협동총무인 브로크만을 대신해 한국YMCA의 미국 측 책임자 활동을 수행한 반하트에 주목했다. 반하트는 이 기간에 한국 사회가 직면한 편향된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우려하며 YMCA가 영적으로 나라를 붙잡고,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출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천명했다.(199~200쪽) 국가적 위기를 하나님 신앙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반하트는 서양 근대 스포츠와 함께 씨름과 같은 전통 스포츠를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저자는 이 시기 반하트가 체육활동 이외에도 근대화된 공업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국 지역사회의 문명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흔적을 추적했다. 이를 통해 반하트가 일제강점기 근대적인 공업 및 농∙ 축업 기술과 경제관념을 직접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생활 개선과 발전을 이룬 숨은 공로자였음을 알 수 있다.

 

4부에서는 반하트의 퇴거와 방콕에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반하트는 전운이 감도는 식민지 공간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반하트가 한국에서 퇴거한 후의 삶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반하트는 잠시 휴식도 없이 하나님의 부름이 있는 태국으로 홀로 향했다. 위험한 발걸음이었다. 태국은 일본 제국의 야욕 속에 점령된 극동의 또 다른 공간이었고, 반하트는 일본의 탄압 속에서 젊음과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총성이 오고 가는 급박하고 위험천만한 공간에서도 반하트는 YMCA 총무로서 피난민 구제사업, 응급사업, 위생사업, 체육 활동 등을 주도하며 인류를 위한 선한 사명을 실천했다. 스포츠를 통해 다져진 남성다운 기독교인의 기질을 끝까지 유지하고 실천한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스포츠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YMCA 선교사들이 전개한 복음 사명의 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YMCA는 극동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에 동아시아의 기독교적 사랑과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YMCA 문명과 교육을 위한 유일한 공간으로 가능했고, 그중에서도 체육 사업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가장 유용한 다리였다. 반하트는 스포츠 복음의 설계자이자 실천가였다. 이 책은 저자의 집요한 사료 수집과 철저한 사료 검증을 통해 잊혀질 수도 있었던 반하트와의 역사적 대화를 실증적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평소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의 삶을 존경해 선교사 생애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있는 저자의 끊임없는 발품이 일구어낸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지만, 반하트라는 열정적인 스포츠 복음 전도사가 없었더라면 스포츠에 기댄 한국교회의 확장도 더딘 행보를 했을 것이며, 일제강점기 근대 스포츠의 발아도 미진했을 것이다. 스포츠의 묘미는 자발적 실천에서 나오는 즐거움에 있다. 필자는 이 책 속의 반하트를 보며 그가 복음 전도 과정에서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이끌려 스스로 온 극동에서 스포츠를 통해 즐거운 복음을 실천했다고 믿는다.

 

 

 

이가람 스포츠 문화사를 전공하였다. "미국 YMCA 역사에 숨겨진 아이러니: 교회의 세속화인가? 스포츠를 통한 복음화인가?", "Philip L. Gillett의 한국근대스포츠 발전에 미친 영향"등의 논문이 있다. 경상국립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Asian Journal of Physical Education 편집위원, 한국체육사학회 국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사상 2022년 3월호(164~169 페이지)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

평신도에게 위임하고, 소그룹으로 섬겨라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 유성준 대표

유성준 교수는 협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2005년 당시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평단)를 출판하여, 1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던 유 목사에게 큰 영향을 준 세이비어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는 “1947년 고든 코스비 목사가 워싱턴 북쪽의 빈민 지역 아담스 모르간(Adams Morgan)에 설립한 교회로, 영성(Inward Journey)과 사역(Outward Journey)의 균형을 강조하며 철저한 입교과정과 훈련과정을 정하고 지키며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이다. ‘세이비어(savior)’는 기독교에서는 ‘구세주’를 일반적으로는 ‘구제하는 사람’을 뜻한다.

유성준 교수는 23년의 미국 이민목회를 마치고 귀국한 후 15년간 협성대학교 교수와 교목실장으로 봉직했다. 2015년부터는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대표로 활동하며, 한국교회에 세이비어교회의 사역과 핵심철학을 전파하데 힘쓰고 있다. 올해 초에는 한국교회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곁들여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신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미국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등 소위 한국교회가 모델로 삼았던 많은 교회들이 사라지고 격변을 겪는 교계 현실 속에서, 오늘날 팬데믹으로 신앙의 지형이 완전히 변해버린 한국교회 상황에서 과연 세이비어교회 이야기가 아직도 유효할까. 연희동에서 유성준 교수를 만나 직접 들어보았다.

 

대표님의 신앙여정이 궁금합니다.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원주 51수송병원에서의 군대생활이다. 1976년 강원도 신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에 군인들을 위한 교육 위생병으로 파견되어 한 달간 농군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영성이 중요하지만,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처럼 복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것이 내 평생의 소명이자 신앙관이 되었다. 제대 후 입학한 협성신학교에서 김찬국 교수님을 만나 ‘정통실천신학 Theology of Ortho-praxis’의 중요성을 배웠다. 1981년 가을에는 협성신학교 첫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오클라호마 필립스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는다. 1985년 여름학기에 마지막으로 공부한 ‘청지기의 삶에 대한 과정Stewardship in Local and Global Context’을 통해 도심지 빈민가와 부유층이 사는 지역들을 두루 방문하면서, 크리스천이 세상을 위해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이애주 사모와 동역하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교회에서는 사례를 받지 않는 자비량 목회를 하기도 했다. 게렛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워싱턴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1994년 세이비어교회를 처음 방문하면서, 내가 신학을 공부하며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던 목회를 실제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교회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세이비어교회 산하 서번트리더십학교(The Servant Leadership School)에서 10년 간 공부하면서 핵심철학 다섯 가지를 배웠는데, 성경, 소명, 공동체, 영성과 기도, 마지막이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나는 이 핵심철학이 감리교회를 시작한 ‘웨슬리Wesley’의 ‘실천적 경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사역의 조화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세이비어교회에서는 통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책을 낸 계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세이비어교회의 설립자 고든 코스비 목사님을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워싱턴 빈민가에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큰 도전을 받았다. 2004년 모교인 협성대학교에 교수로 부름을 받아 한국에 오게 되면서 1년 동안 준비해 쓴 책이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양적 팽창, 외형에 치우침, 개교회 중심주의, 내부 지향적 체제 그리고 목회자의 명예욕과 재물욕 등 여러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새롭고 올바른 교회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세이비어교회를 소개한 것이다. 이번에는 코로나 상황까지 겹치면서,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요청하여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신앙과지성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세이비어교회도 75주년을 맞았습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의 은퇴와 소천, 사회상의 변화 등을 겪으면서도 그 탁월함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코스비 목사가 은퇴한 후 세이비어교회는 후임자를 정하지 않고 오히려 본부교회를 해체했다. 그동안 함께 사역하던 10개의 지교회 형태 사역공동체를 독립시켰다. 코스비 목사가 평소에 이야기 해오던 대로 “내적인 영성, 영성의 표출로서의 외적인 사역, 그리고 사랑과 책임 있는 공동체에 중점을 둔 작지만 밀도 있게 헌신하는 훈련된 사람들의 모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세이비어교회의 평신도 숫자는 150명을 넘긴 적이 없다. 세이비어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 한 시간 성경 읽고 기도하기, △2,3년이 소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학교와 서번트리더십학교 훈련과정 참여하기, △온전한 십일조헌금 드리기, △소그룹 미션그룹 모임에 매주 참여하기, △45가지 지역사회 사역 중에 은사별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 △자신의 삶의 전 지경을 포함하는 영적 자서전 쓰고 공동체에 발표하기 등의 까다로운 과정을 따라야 한다. 이런 입교과정은 일회성이 아니라 매년 갱신해야 한다. 세이비어교회는 지금도 △빈민 청소년을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일대일 멘토링과 과외 프로그램, △매년 천여 명 실업자들을 훈련시키고 취업시키는 취업사역, △미국 유일의 노숙자 병원인 그리스도의집,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역,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사마리아인 여인숙 주거 사역 등 지역에 꼭 필요한 45가지 관련 사역들을 펼치고 있다. 고도로 훈련된 평신도들의 소명과 동역 덕분에 또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지금도 그 사역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유성준교수TV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9C%A0%EC%84%B1%EC%A4%80%EA%B5%90%EC%88%98tv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철저한 영성과 지역사회 사역의 균형을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실현하는 세이비어교회의 서번트 목회를 대안으로 제시해 왔다. 신학을 가르칠 때도 그 지역과 현실에 맞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 워싱턴 빈민가에 최적화된 세이비어교회의 사역을 그냥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맞게 재해석해서 제공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국교회 상황 가운데 적용 가능한 보다 실제적인 사역 매뉴얼에 집중했다. 이제는 이론으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적용하고 변화해야 한다.

 

한국에도 세이비어교회처럼 서번트리더십을 실천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사회복지와 기독교 복지는 다르다. 기독교 복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아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내 안에 영성이 가득 차고 흘러넘쳐야 사역으로 드러날 수 있다. 고든 코스비 목사가 주장한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사역의 조화’도 같은 말이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해도 아무도 교회를 찾지 않는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 개척’이 아니라 ‘사역의 개척’이다. 일부 목사님들이 말하는 ‘마을목회’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지역의 필요를 중심으로 사역을 넓혀 나가는 세이비어교회의 사역과 다르지 않다. 이번 책에도 내가 임원으로 동역하고 있는 탈북민 자활을 위한 사회적 기업 ‘위로재단’ 이 펼치는 다양한 사역 등 실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나아가 책의 성격상 소개하지 못했지만, 세이비어교회를 모델로 한국의 상황에 맞게 목회하는 교회도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천의 김 목사 부부의 경우, 미국 세이비어교회를 방문하고 서번트리더십학교를 이수한 뒤 2003년 선한공동체를 시작했다. 청소년을 위한 주거공동체 및 밥차 사역 등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 서번트 목회를 하는 교회와 목회자, 평신도를 소개하는 책도 준비하고자 한다.

◇ 40여 년 동역해온 유성준 목사와 이애주 사모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교회는 목사 중심이다. 세이비어교회의 사역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다. 서번트 리더십이 교회의 목표 철학이 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위임’이다. 목사의 권한을 훈련시킨 교인들에게 위임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나 교회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소명에 따라 헌신할 수 있도록, 자발적인 소그룹을 만들어 사역할 수 있도록 세워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영성을 가다듬어야 하고 외적 사역을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에서 교육을 받는 분들은 목회자가 많은데, 앞으로는 평신도도 훈련원을 많이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회가 위탁을 의뢰해도 좋을 것이다. 당장 훈련원을 이용하지 못하더라도 이 책과 함께 <유성준교수TV>(유튜브)를 시청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출처 :이연경 기자(주간기독교)

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