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꿈꾸던 광복 이룬 코리아 자랑스러워

“할아버지 꿈꾸던 광복 이룬 코리아 자랑스러워”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 한국 찾아 건국포장 대리 수훈

 

 

 

 

 

우리암 선교사의 4대손 그라프톤 윌리엄스(왼쪽)씨와 3대손 알프레드 윌리엄스(가운데)씨, 델리 윌리엄스(오른쪽)씨를 14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만났다.

 

아들 이름을 광복이라고 지을만큼 대한민국의 해방을 꿈꾼 미국인 선교사의 업적이 조명됐다.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국인 우리암(Franklin E. C. Williams, 1883~1962) 선교사와 아들 우광복 선생(George Z. Williams, 1907~1994)의 후손들이 한국을 찾았다.

사단법인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서만철 박사) 산하의 우리암·우광복선교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에 이어 우리암 선교사의 후손들을 한국에 초청했다. 올해는 우리암 선교사에 대한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의 건국포장 수훈을 계기로 방한이 이뤄졌다. 10명의 후손이 대리 수훈을 위해 지난 11일 입국했다. 14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과 우리암 선교사의 3대손인 델리(Delee Willams)씨와 알프레드(Alfred Willams)씨, 4대손 그라프톤 윌리암스(21·Grafton Addison Willams)씨를 만났다.

우리암 선교사는 충남 공주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1909년 영명학교를 세우고 독립유공자 유관순 열사를 키워낸 인물이다. 1906년 공주로 온 이후 1940년 강제 추방될 때까지 34년간 공주를 비롯한 충남 지역에서 교육과 선교를 전개했다.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을 지낸 조병욱 지사와 유관순 열사의 오빠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우석 지사 등이 영명학교 출신이다.

우리암 선교사는 한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첫아들 조지의 이름을 우광복으로 짓기도 했다. 우광복 선생은 14살에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의 광복 소식을 듣고 돌아와 군의관으로 자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을 했다. 서 회장은 “미 군정에서 일할 50명의 한국인을 선발할 때 우광복 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선발된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3대손 델리씨는 자신이 기억하는 할아버지 우광복 선생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14살까지 살았던 우광복 할아버지는 본인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컸다”며 “제가 어렸을 때까지도 한국과 미국의 경제 격차가 매우 컸다. 할아버지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계없이 한국인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열정적인지를 알려주셨다”고 소개했다.

우광복(사진 오른쪽) 선생과 손자들. 사진 가장 왼쪽이 델리 윌리엄스씨, 우광복 선생 바로 앞이 알프레드 윌리엄스씨다. 델리 윌리엄스씨 제공

 

델리씨의 동생 알프레드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할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단번에 이해했다”며 “할어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 대해 알리기 위해 무척 노력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윌리엄스라는 이름이 미국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인데 지난해에 이어 이렇게 한국에 오면서 우리 가족들이 윌리엄스라는 이름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며 “우리 조상의 업적을 발견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나서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4대손 그라프톤씨는 “지난해 한국에 오기 전까지 선조들이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들인지 몰랐다”며 “한국이 광복을 이룬 뒤 이렇게 발전하고 교회가 많이 세워져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라프톤씨는 “더 늦기 전에 선조들의 업적을 배우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할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해서 자녀들에게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엘프레드씨는 “공주에 우리암 우광복 기념 박물관 건립이 논의되고 있다고 들었다”며 “예산이 많이 들 텐데 우리 가족도 그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 이바지하며 선조들의 한국 사랑을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해 우리암 선교사 후손 한국 초청 행사에서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 알프레드 윌리엄스씨 제공

 

한편 15일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에게 직접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윤 대통령은 “1908년 입국한 미국인 선교사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은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며 “1943년 인도 전선에서 광복군의 한·영 연합 작전을 도왔고 광복 직후엔 미 군정청의 농업 정책 고문으로 발탁돼 활동했다”고 업적을 소개했다.

서만철 회장과 임연철 전 국립극장장이 지난해 펴낸 책 ‘우리암과 우광복 이야기'(밀알북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8567297

“6·25전쟁, 한국만 아닌 자유주의 승리 위한 싸움”… 그의 사기 고취로 참패 피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비망록 ‘한국전쟁’
미군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 56년 만에 번역
여성 종군기자 히긴스, 선교사 포로 젤러스 등
한국전쟁 다룬 책 잇따라 출간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무엇보다 전투의지 회복과 자긍심 고취가 시급하다고 봤다.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가 전방지휘소를 방문해 야전 지휘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리지웨이는 이후 유엔군사령관까지 오른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마침내 대규모 포성과 함께 한반도에 전면전 발발 신호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우리가 탄생시킨 약소국 대한민국은 자신들이 저항 시늉만 할 뿐 싸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도 상호 지원한다는 과거 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 군사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6·25전쟁을 이끈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유엔군사령관은 자서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 영웅 맥아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에 견줘 명성이 특출나지는 않다. 그러나 3년간의 한국전쟁 중 2년가량 군을 이끌면서 한반도 적화통일을 저지하고 휴전선 위치까지 전선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지휘관이 그다. 리지웨이가 1967년 출간한 한국전쟁 징비록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이 출간 56년 만에 뒤늦게 번역됐다. 전쟁터를 누빈 여성 종군기자,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국인 선교사가 쓴 한국전쟁 책도 전쟁 발발 73년, 정전 70년을 기념해 출간됐다.

 

매슈 B 리지웨이 지음ㆍ박권영 옮김ㆍ플래닛미디어 출판·355쪽ㆍ2만5,000원

리지웨이가 1950년 12월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유엔군은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동안 북진을 이어갔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며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뺏기고 남하했다. 국군·유엔군에서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힘들다는 패색이 짙었다. 미군·유엔군에서는 “왜 우리가 낯선 땅에서 싸우다 죽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리지웨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사기를 고취하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21일 전 장병에게 지휘 서신을 내려보낸다. “이것은 동맹국 한국의 자유와 국가 생존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다. 어떤 군 사령부도 우리보다 더 큰 도전을 하거나 우리 자신과 국민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펴낸 플래닛미디어 이보라 편집장은 “한국전쟁은 우리의 전쟁인데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과오는 온데간데없고 이념만 남아 있다”며 “미국 입장의 책이지만 우리가 전쟁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또 승리를 이끌어내기까지 어떤 감동적 과정이 있는지 읽을 수 있는 역작”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 헤럴드트리뷴 소속 기자였던 마거릿 히긴스가 한국전쟁을 취재하고 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의 표지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성으로선 최초로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에서 수상했다. 오른쪽은 히긴스가 맥아더 장군과 대화하는 모습. 아마존 캡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가 지은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은 전쟁의 긴박함과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 책이다. 뉴욕 헤럴드트리뷴 도쿄지국장이던 히긴스는 전쟁이 나자 이틀 만인 6월 27일 서울로 날아왔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강 인도교 폭파·낙동강전투·인천상륙작전·서울수복 현장을 직접 목격한다. 서울수복 이후 명동성당을 찾은 후엔 이렇게 썼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대신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이 우리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미국을 비판했다.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본국이 전쟁의 참상을 알아야 병력과 물자를 원활히 공급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을 향한 히긴스의 평가는 이렇다. “전쟁 중 한반도에서 많은 비극이 발생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것이 자유세계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우리는 지금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국제적인 자명종 시계 역할을 한 것이다.”

 

임연철 번역ㆍ밀알북스 발행ㆍ372쪽ㆍ2만5,000원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를 그린 그림. 상하이 사립 미술관인 룽(龍)미술관에 전시됐다. 연합뉴스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가 쓴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이라는 혼돈에 빠진 민간인의 고통과 절망을 알려주는 저술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당일 북한군 포로가 돼 3년 전쟁기간 내내 인권을 유린당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공군 무전병으로 참전한 경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국군·유엔군의 북진으로 한겨울에 북한 만포와 중강진 일대를 도보로 올라가는 ‘죽음의 행군’을 시작한다.

추위, 굶주림, 북한의 즉결 처분으로 미군 포로 700명 중 500여 명, 민간인 포로 75명 중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젤러스와 함께 살아남은 민간인 포로 50여 명은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했고, 미군 포로는 겨우 250여 명만 생존해 휴전협정 후 석방된다. 번역자는 후기에 이렇게 썼다. “조명되지 못하고 묻혀 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잊혀 가는 내한 선교사의 숭고한 업적을 한 분이라도 더 발굴해야 한다.”

정지용 기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62509250000122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의 6·25 회고록
당시 北포로였던 미국 선교사 수기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 박권영 옮김 | 플래닛미디어 | 356쪽 | 2만5000원

 

 

적의 손아귀에서
래리 젤러스 저 | 임연철 편역 | 밀알북스 | 372쪽 | 2만5000원

“한국군에는 북한군처럼 중국에서 전투 경험을 쌓고 돌아온 인적 자원들이 거의 없었으며, 현대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 교육받은 인원들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무엇보다 한국군 내에서는 ‘체면’이 가장 중요했다. 한국군 장교들은 자신들보다 계급이 낮았던 미군 고문관들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별세한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한반도의 6·25전쟁에 참전한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장군의 회고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군은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군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을 폄훼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남한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고 가정에 헌신적이었다. 한국군에게 부족한 것은 싸우려는 의지나 용기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체계적이고 강한 훈련과 훌륭한 리더십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6·25 발발 73주년과 정전 70주년을 맞아 미국인의 시선으로 6·25전쟁을 본 회고록 두 권이 출간됐다.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해임 이후 유엔군사령관에 오른 리지웨이 장군의 6·25전쟁 회고록이고,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미국인 선교사의 수기(手記)다.

리지웨이는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우리가 간과해 왔던 전쟁의 중요한 지점을 짚는다. 그가 통탄한 것은 한국군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1951년 1월 1일 아침에 서울 북쪽에서 마주친 미군 장병들은 개인 소총과 공용 화기를 모두 버리고 사색이 된 채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중공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리지웨이가 보기에 한반도에서 제대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폭탄과 유엔을 믿은 미국은 심리적으로 안주한 채 성급하게 군사력 단축을 단행했고, 설사 전쟁이 발생해도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다.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둔 1950년 12월, 더글러스 맥아더(앞줄 오른쪽) 사령관과 함께 전장을 순시하는 매슈 리지웨이(앞줄 가운데) 장군.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를 반복적으로 무시한 끝에 해임된 맥아더를 비판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리지웨이의 역할은 패배주의가 만연한 미 8군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일이었다. 예하 부대 지휘소를 방문해 장병들의 태도와 대화 내용,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전투 의지를 들여다봤고, 전투의 의의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어떤 경우라도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데려간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전투 의지를 고취하고 위력 수색과 공세 작전을 펼친 끝에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38선 이북까지 회복해 한반도의 적화 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리지웨이는 지휘 서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자유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서구 문명의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물리칠 수 있느냐, 아니면 포로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며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리지웨이의 말이 거짓말이거나 과장이라 의심된다면 ‘적의 손아귀에서’를 읽어볼 만하다. 개성 송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는 6·25 발발 당일 북한군의 포로가 돼 평양의 수용소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북한군은 민간인 포로 75명을 미군 포로 700명과 함께 평북 만포로 이동시켰는데, 북진 속도가 빨라지자 만포부터 더 북쪽 길을 한겨울에 걷게 하는 ‘죽음의 행군’이 시작됐다.
대부분 여름에 붙잡혀 얇은 옷밖에 없는 포로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의 한파 속에서 200㎞ 산길을 걷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미군 포로 낙오자 중 인민병원으로 보내준다고 속인 뒤 사살한 인원만 200여 명이었다. 결국 미군 포로 약 500명과 민간인 포로 20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아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고통을 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사라졌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제도를 향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제도일 뿐이다.”

유석재 기자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3/06/24/3MLGKAFF2NEGTLE4MSXOQK7WQA/

휴심정 뉴스(조현 기자)–미국 브루더호프 공동체 생활 15년…푸른 초원위 사랑·배려의 삶 있더라 ​

반하트-스포츠맨십의 전도사

스포츠를 통한 복음 전도사,

반하트

 

이가람 경상국립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

 

 

한국 스포츠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에게 반하트는 익숙한 이름이다. 필자 역시 YMCA와 스포츠의 연계과정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반하트라는 이름을 매우 많이 접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의 이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조우하면서 잠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반하트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요람인 ​YMCA가 최초로 초빙한 한 체육지도자로서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에 근대 스포츠가 발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체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전수한 농구와 배구 등의 각종 근대 스포츠는 한국 청년들이 일본과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YMCA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한국인들이 잠시나마 울분을 표출할 수 있게 해 주는 원천이었다. YMCA에서 근대적인 스포츠 활동을 배운 한국 청년들이 운동장에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일본과 대결하고 일시적인 승리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YMCA는 국제적인 기독교 단체로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일본의 통제와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였고, 그곳에서 반하트는 한국인들에게 근대 스포츠를 직접 가르치고 전수하면서 한국 사회의 근대 스포츠를 통한 문명화에 앞장섰다. 반하트는 근대화된 신체 문화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 YMCA에 체육지도자로서 한국 청년들에게 신체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스포츠를 통해 젊은이들의 남성다움을 고취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스포츠는 신체적인 언어이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들은 새로운 문화와 언어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스포츠는 서양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을 친화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한국 야구의 시발점이 YMCA 야구단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예증한다. 야구는 한국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낯선 교회로 걸어가는 복음 티켓으로 이용되었다.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다양한 근대 스포츠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 향유되고 있는 주된 스포츠가 되었다. 농구와 배구도 반하트가 주축이 되어 YMCA를 통해 한국에 도입되었고, 현재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 문화로 자리잡았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교회와 스포츠가 결속된 연유는 바로 스포츠가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초의 YMCA 체육지도자였던 반하트의 생애를 정리한 책 『반하트: 스포츠맨십의 전도사』는 한국 교회사와 근대 스포츠의 결속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선교사들에 관한 연구는 많이 축적되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건너온 수많은 선교사들이 펼친 숨은 사역의 발자취가 연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 한 분야가 바로 YMCA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문명화와 복음적 사명을 실천한 선교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스포츠를 통한 문명화와 전도를 이룩한 미국YMCA 선교사들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절실하다. 미국YMCA는 초창기 영국YMCA와는 달리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기독교 확장을 위한 핵심적인 매개체로 활용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YMCA 체육 사업을 주도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저서는 YMCA 선교사들의 역사적 연구를 위한 새로운 지평과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저술한 임연철 박사는 반하트의 삶을 4부로 구성하고 있다. 1부 "체육선교사 준비기"에서는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 반하트의 성장과 결혼 과정에 대한 삶을 기록하고 있다. 반하트는 어린 시절부터 야성적인 에너지를 소유했다는 점에서 체육선교사가 되기 위한 선천적인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대학 시절에 농구팀의 선수와 대학 YMCA의 위원회를 경험하며 YMCA 체육지도자로 일할 수 있는, 영적∙신체적∙정신적으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농구는 YMCA가 발명한 스포츠 문화이다. 반하트가 학창 시절 YMCA가 창안한 스포츠 문화를 기반으로 스포츠 복음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가슴 속에 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2부에서는 YMCA 체육부 지도자로 내한한 반하트의 초창기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1916년은 한국 스포츠사에서 중대한 해이다. YMCA 가 한국 최초로 실내체육관을 개장하며 동시에 본격적으로 스포츠를 보급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로, 이를 통해 스포츠의 대중화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체육 교육을 전담할 책임자 반하트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반하트는 한국에 올 때 짐 속에 "농구공 1개, 야구공과 포수용 글러브 각 1개, 배구공 1개, 그리고 치료가 불가능한 스포츠 사랑 정신"을 함께 가지고 왔다.(85쪽) 스포츠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YMCA 지도자로서 내한 이후에 빠르게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동시에 거의 모든 운동 종목을 직접 코치하고 운영함으로써 체육 활동의 발전과 보급에 앞장섰다.

 

반하트를 통해 한국인들은 강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체육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반하트는 스포츠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활용되는 것을 넘어 스포츠를 사회적 개혁의 매개체로 인식했다. 그는 공정한 규칙 아래 건전하고 질서 있는 행동을 추구하는 스포츠 활동을 통해 문명화된 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다.(121~123쪽) 두 아들을 잃는 역경 속에서도 그는 청소년교육, 실업교육, 농촌교육 등에 헌신하며 한국 사회의 개선과 진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3부 "한국 봉사 후반기(1930~1940)"에서 저자는 서울YMCA 협동총무인 브로크만을 대신해 한국YMCA의 미국 측 책임자 활동을 수행한 반하트에 주목했다. 반하트는 이 기간에 한국 사회가 직면한 편향된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우려하며 YMCA가 영적으로 나라를 붙잡고,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출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천명했다.(199~200쪽) 국가적 위기를 하나님 신앙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반하트는 서양 근대 스포츠와 함께 씨름과 같은 전통 스포츠를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저자는 이 시기 반하트가 체육활동 이외에도 근대화된 공업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국 지역사회의 문명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흔적을 추적했다. 이를 통해 반하트가 일제강점기 근대적인 공업 및 농∙ 축업 기술과 경제관념을 직접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생활 개선과 발전을 이룬 숨은 공로자였음을 알 수 있다.

 

4부에서는 반하트의 퇴거와 방콕에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반하트는 전운이 감도는 식민지 공간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반하트가 한국에서 퇴거한 후의 삶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반하트는 잠시 휴식도 없이 하나님의 부름이 있는 태국으로 홀로 향했다. 위험한 발걸음이었다. 태국은 일본 제국의 야욕 속에 점령된 극동의 또 다른 공간이었고, 반하트는 일본의 탄압 속에서 젊음과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총성이 오고 가는 급박하고 위험천만한 공간에서도 반하트는 YMCA 총무로서 피난민 구제사업, 응급사업, 위생사업, 체육 활동 등을 주도하며 인류를 위한 선한 사명을 실천했다. 스포츠를 통해 다져진 남성다운 기독교인의 기질을 끝까지 유지하고 실천한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스포츠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YMCA 선교사들이 전개한 복음 사명의 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YMCA는 극동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에 동아시아의 기독교적 사랑과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YMCA 문명과 교육을 위한 유일한 공간으로 가능했고, 그중에서도 체육 사업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가장 유용한 다리였다. 반하트는 스포츠 복음의 설계자이자 실천가였다. 이 책은 저자의 집요한 사료 수집과 철저한 사료 검증을 통해 잊혀질 수도 있었던 반하트와의 역사적 대화를 실증적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평소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의 삶을 존경해 선교사 생애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있는 저자의 끊임없는 발품이 일구어낸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지만, 반하트라는 열정적인 스포츠 복음 전도사가 없었더라면 스포츠에 기댄 한국교회의 확장도 더딘 행보를 했을 것이며, 일제강점기 근대 스포츠의 발아도 미진했을 것이다. 스포츠의 묘미는 자발적 실천에서 나오는 즐거움에 있다. 필자는 이 책 속의 반하트를 보며 그가 복음 전도 과정에서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이끌려 스스로 온 극동에서 스포츠를 통해 즐거운 복음을 실천했다고 믿는다.

 

 

 

이가람 스포츠 문화사를 전공하였다. "미국 YMCA 역사에 숨겨진 아이러니: 교회의 세속화인가? 스포츠를 통한 복음화인가?", "Philip L. Gillett의 한국근대스포츠 발전에 미친 영향"등의 논문이 있다. 경상국립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Asian Journal of Physical Education 편집위원, 한국체육사학회 국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사상 2022년 3월호(164~169 페이지)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

평신도에게 위임하고, 소그룹으로 섬겨라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 유성준 대표

유성준 교수는 협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2005년 당시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평단)를 출판하여, 1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던 유 목사에게 큰 영향을 준 세이비어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는 “1947년 고든 코스비 목사가 워싱턴 북쪽의 빈민 지역 아담스 모르간(Adams Morgan)에 설립한 교회로, 영성(Inward Journey)과 사역(Outward Journey)의 균형을 강조하며 철저한 입교과정과 훈련과정을 정하고 지키며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이다. ‘세이비어(savior)’는 기독교에서는 ‘구세주’를 일반적으로는 ‘구제하는 사람’을 뜻한다.

유성준 교수는 23년의 미국 이민목회를 마치고 귀국한 후 15년간 협성대학교 교수와 교목실장으로 봉직했다. 2015년부터는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대표로 활동하며, 한국교회에 세이비어교회의 사역과 핵심철학을 전파하데 힘쓰고 있다. 올해 초에는 한국교회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곁들여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신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미국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등 소위 한국교회가 모델로 삼았던 많은 교회들이 사라지고 격변을 겪는 교계 현실 속에서, 오늘날 팬데믹으로 신앙의 지형이 완전히 변해버린 한국교회 상황에서 과연 세이비어교회 이야기가 아직도 유효할까. 연희동에서 유성준 교수를 만나 직접 들어보았다.

 

대표님의 신앙여정이 궁금합니다.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원주 51수송병원에서의 군대생활이다. 1976년 강원도 신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에 군인들을 위한 교육 위생병으로 파견되어 한 달간 농군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영성이 중요하지만,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처럼 복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것이 내 평생의 소명이자 신앙관이 되었다. 제대 후 입학한 협성신학교에서 김찬국 교수님을 만나 ‘정통실천신학 Theology of Ortho-praxis’의 중요성을 배웠다. 1981년 가을에는 협성신학교 첫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오클라호마 필립스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는다. 1985년 여름학기에 마지막으로 공부한 ‘청지기의 삶에 대한 과정Stewardship in Local and Global Context’을 통해 도심지 빈민가와 부유층이 사는 지역들을 두루 방문하면서, 크리스천이 세상을 위해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이애주 사모와 동역하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교회에서는 사례를 받지 않는 자비량 목회를 하기도 했다. 게렛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워싱턴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1994년 세이비어교회를 처음 방문하면서, 내가 신학을 공부하며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던 목회를 실제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교회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세이비어교회 산하 서번트리더십학교(The Servant Leadership School)에서 10년 간 공부하면서 핵심철학 다섯 가지를 배웠는데, 성경, 소명, 공동체, 영성과 기도, 마지막이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나는 이 핵심철학이 감리교회를 시작한 ‘웨슬리Wesley’의 ‘실천적 경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사역의 조화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세이비어교회에서는 통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책을 낸 계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세이비어교회의 설립자 고든 코스비 목사님을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워싱턴 빈민가에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큰 도전을 받았다. 2004년 모교인 협성대학교에 교수로 부름을 받아 한국에 오게 되면서 1년 동안 준비해 쓴 책이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양적 팽창, 외형에 치우침, 개교회 중심주의, 내부 지향적 체제 그리고 목회자의 명예욕과 재물욕 등 여러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새롭고 올바른 교회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세이비어교회를 소개한 것이다. 이번에는 코로나 상황까지 겹치면서,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요청하여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신앙과지성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세이비어교회도 75주년을 맞았습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의 은퇴와 소천, 사회상의 변화 등을 겪으면서도 그 탁월함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코스비 목사가 은퇴한 후 세이비어교회는 후임자를 정하지 않고 오히려 본부교회를 해체했다. 그동안 함께 사역하던 10개의 지교회 형태 사역공동체를 독립시켰다. 코스비 목사가 평소에 이야기 해오던 대로 “내적인 영성, 영성의 표출로서의 외적인 사역, 그리고 사랑과 책임 있는 공동체에 중점을 둔 작지만 밀도 있게 헌신하는 훈련된 사람들의 모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세이비어교회의 평신도 숫자는 150명을 넘긴 적이 없다. 세이비어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 한 시간 성경 읽고 기도하기, △2,3년이 소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학교와 서번트리더십학교 훈련과정 참여하기, △온전한 십일조헌금 드리기, △소그룹 미션그룹 모임에 매주 참여하기, △45가지 지역사회 사역 중에 은사별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 △자신의 삶의 전 지경을 포함하는 영적 자서전 쓰고 공동체에 발표하기 등의 까다로운 과정을 따라야 한다. 이런 입교과정은 일회성이 아니라 매년 갱신해야 한다. 세이비어교회는 지금도 △빈민 청소년을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일대일 멘토링과 과외 프로그램, △매년 천여 명 실업자들을 훈련시키고 취업시키는 취업사역, △미국 유일의 노숙자 병원인 그리스도의집,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역,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사마리아인 여인숙 주거 사역 등 지역에 꼭 필요한 45가지 관련 사역들을 펼치고 있다. 고도로 훈련된 평신도들의 소명과 동역 덕분에 또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지금도 그 사역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유성준교수TV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9C%A0%EC%84%B1%EC%A4%80%EA%B5%90%EC%88%98tv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철저한 영성과 지역사회 사역의 균형을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실현하는 세이비어교회의 서번트 목회를 대안으로 제시해 왔다. 신학을 가르칠 때도 그 지역과 현실에 맞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 워싱턴 빈민가에 최적화된 세이비어교회의 사역을 그냥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맞게 재해석해서 제공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국교회 상황 가운데 적용 가능한 보다 실제적인 사역 매뉴얼에 집중했다. 이제는 이론으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적용하고 변화해야 한다.

 

한국에도 세이비어교회처럼 서번트리더십을 실천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사회복지와 기독교 복지는 다르다. 기독교 복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아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내 안에 영성이 가득 차고 흘러넘쳐야 사역으로 드러날 수 있다. 고든 코스비 목사가 주장한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사역의 조화’도 같은 말이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해도 아무도 교회를 찾지 않는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 개척’이 아니라 ‘사역의 개척’이다. 일부 목사님들이 말하는 ‘마을목회’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지역의 필요를 중심으로 사역을 넓혀 나가는 세이비어교회의 사역과 다르지 않다. 이번 책에도 내가 임원으로 동역하고 있는 탈북민 자활을 위한 사회적 기업 ‘위로재단’ 이 펼치는 다양한 사역 등 실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나아가 책의 성격상 소개하지 못했지만, 세이비어교회를 모델로 한국의 상황에 맞게 목회하는 교회도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천의 김 목사 부부의 경우, 미국 세이비어교회를 방문하고 서번트리더십학교를 이수한 뒤 2003년 선한공동체를 시작했다. 청소년을 위한 주거공동체 및 밥차 사역 등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 서번트 목회를 하는 교회와 목회자, 평신도를 소개하는 책도 준비하고자 한다.

◇ 40여 년 동역해온 유성준 목사와 이애주 사모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교회는 목사 중심이다. 세이비어교회의 사역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다. 서번트 리더십이 교회의 목표 철학이 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위임’이다. 목사의 권한을 훈련시킨 교인들에게 위임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나 교회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소명에 따라 헌신할 수 있도록, 자발적인 소그룹을 만들어 사역할 수 있도록 세워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영성을 가다듬어야 하고 외적 사역을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에서 교육을 받는 분들은 목회자가 많은데, 앞으로는 평신도도 훈련원을 많이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회가 위탁을 의뢰해도 좋을 것이다. 당장 훈련원을 이용하지 못하더라도 이 책과 함께 <유성준교수TV>(유튜브)를 시청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출처 :이연경 기자(주간기독교)

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436

 

 

 

 

 

 

 

 

 

 

한국교회 대부흥과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로버트 하디

한국교회 대부흥과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로버트 하디

 

김칠성 목원대학교 교수

 

한국 개신교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성장과 발전의 밑바탕에는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다. 이렇게 한국 개신교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수많은 선교사들 중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1865-1949, 河鯉泳, 하리영) 선교사이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원산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한국 대부흥의 주역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디 선교사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1886년에 시작된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의 영향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과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1890년 조선에 입국하여 8년간 독립선교사(교단 파송을 받지 않은 선교사를 지칭)로 활동했다. 그 후 1898년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대부흥, 신학교육, 농촌계몽, 문서선교 등 다방면에서 한국 개신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은퇴한 이덕주 교수는 최근 하디 선교사의 전기를 서술한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를 펴냈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의 1장에는 하디의 출생과 선교사가 되기까지의 과정(1865-90), 2장에는 독립선교사로 활동했던 8년의 시간(1890-98), 3장에는 한국 부흥을 위해 기여한 내용(1898-1907)이 담겨 있다. 이어서 4장에서는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서 교수와 교장으로 활동했던 내용(1907-23), 5장에서는 문서선교, 농촌계몽운동, 남북감리교회 연합운동 및 그의 은퇴와 별세를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6장에서는 하디의 저술(논문과 단행본)과 그의 신학사상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선교사 하디가 다방면에서 한국 개신교 발전을 위해 기여한 내용을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다음의 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하디가 처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한국교회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인 저자의 풍부한 한국사 지식은 하디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과 일제강점기에 하디가 내린 결정을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그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연구는 매우 유용하다.

둘째, 이 책은 다양한 자료의 활용이 돋보인다.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로 시작하여 이후 미국 남감리교 소속으로 한국에서 무려 45년간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가 직접 쓴 글이나 그에 관한 내용이 캐나다, 미국, 한국 등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저자는 해외에 있는 자료뿐만 아니라 오래된 국내 자료도 발굴하여 하디의 생애와 활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특히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국내외 자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였기에, 후대 연구자들이 앞으로 하디를 연구할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예상된다.

셋째, 이 책에서 사용한 도표들은 독자들이 하디의 활동을 더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 책은 하디 선교사의 생애와 다양한 활동을 세세히 다루었기에, 그 서술 분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저자는 곳곳에서 도표를 통해 앞서 소개한 내용을 요약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부록에 실린 ‘하디 연표’는 하디와 그의 가족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연대기적 상황을 병기함으로써 하디의 생애와 활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첫째, 몇 가지 표현상의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1) 저자는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서 출생한 펜윅”(77쪽)이라고 그를 소개하며, 그 이후 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40쪽에서 펜윅을 하디, 에비슨과 같은 “감리교 신도들”로 표기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하디, 펜윅, 에비슨은 모두 캐나다 출신이고, 하디와 에비슨은 감리교 출신이지만(에비슨은 후에 장로교로 소속을 변경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됨), 펜윅이 감리교인인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2) 58-59쪽에서는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VM)의 영향의 일환으로 하디에게 선교적 자극을 준 인물인 존 포어맨(John N. Foreman)을 “목사”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디의 1914년 혹은 1934년의 글을 기반으로 작성된 내용이다. 하지만 존 포어맨은 당시 목사가 아니었고,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신학교에 갓 입학한 하디 또래의 젊은 신학생이었다. 아울러 67쪽에서 “목사”로 소개한 로버트 와일더(Robert Wilder, 1863-1938) 또한 당시에는 하디보다 두 살 많은 20대의 젊은 대학생이었다. 다시 말해 포어맨과 와일더 둘 다 후에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하디가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 이 두 사람을 목사로 지칭했지만, 하디가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던 1886년에 캐나다에 와서 해외선교자원운동을 펼쳤던 이 두 사람은 당시에 목사가 아닌 20대 청년이었다.

(3) 78-79쪽에서 저자는 펜윅에게 선교적 영향을 미친 “와일더 형제”를 로버트 와일더의 아버지인 로열 와일더(Royal Wilder) 목사(인도 선교사)로 보고 있다. 하지만 “와일더 형제”는 로버트 와일더가 맞다. 왜냐하면, 당시 로열 와일더는 자신의 아들이 대학교를 순회하면서 선교자원운동을 펼치기보다는 자신의 선교잡지 출판사역을 맡아주기를 바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버트 와일더 역시 인도 선교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인도에서의 경험을 이미 무디의 수련회에서 강연함으로써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4) 88쪽과 188쪽에서 저자는 제중원(초기에는 광혜원)을 “국립병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서울대학교(국립병원)와 연세대학교(선교병원)가 여전히 논쟁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필자가 보기에는 ‘왕립병원’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둘째, “부흥”이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개념상의 혼란이 보인다.

하디가 한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부흥이다. 그런데 저자는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개념을 포괄하거나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특히 “부흥운동”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먼저, “부흥”을 교회의 성장과 번영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276쪽에서는 부흥을 성장과 동의어로, 277쪽에서는 “부흥과 성장,” 그리고 310쪽에서는 “부흥이나 성장”이라고 표현하고, 438-439쪽에서도 “부흥, 성장”, “부흥과 성장”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347쪽에서는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 규모가 커지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신도와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이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원산 부흥을 “거룩한 회심운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373쪽에서 하디가 윤성근에 관해 기술한 영어 원문을 번역하면서 저자는 ‘prosper’(번영)를 “부흥”으로 번역하였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오직 교회가 부흥되기만 바랐습니다.”(He loved the Church, and his whole desire was to see it prosper.)

 

그러나 필자의 이전 연구[“하디의 회개, 부흥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선교신학」 제32집(2013): 175-199]에서 이미 밝혔고, 1923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2월 부흥회 주제가 “성령세례”였듯이, 부흥은 회심(conversion)이나 교회성장(church growth)이 아니라 바로 “성령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의미한다. 특히 ‘부흥운동’(revival movement, Revivalism)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이전의 다른 연구[“원산부흥, 일반부흥인가, 대부흥인가” 「한국교회사학회지」 제34집(2013): 253-283]에서 밝혔듯이, ‘부흥’과는 전혀 다른 “전문적인 대중전도”(professional mass evangelism)(에드윈 오르, Edwin Orr) 또는 “부흥 혹은 회심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안 머레이, Iain H. Murray)으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디가 말하는 부흥은 교회성장이나 회심을 위한 전도운동을 의미하지 않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경험한 기존 신자들에게 “성령의 부으심” 또는 “성령세례”가 임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성화된 삶을 살아가며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 있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부흥에 관한 용어를 사용할 때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일반부흥과 대부흥의 차이, 그리고 원산 부흥과 평양 부흥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 관한 필자의 연구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셋째, 네비어스 선교방법에 관한 하디의 입장을 서술한 부분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저자는 358-359쪽에서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 이후에 토착인에 의한 전도활동(self propagation)과 자립운영(self support)을 언급하면서 “네비어스 선교방법”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네비어스 선교방법론은 감리교에서 채택한 선교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디와 연관 짓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하디가 행한 일에 네비어스적 방법론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디가 네비어스의 방법론을 따랐다고 말하기는 어렵기에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관해서는 최근에 발표한 필자의 연구[“한국선교 초기 감리교와 장로교의 교회성장 비교연구”, 「선교신학」 제64집(2021): 166-192]를 참고하기 바란다.

 

은퇴 이후에도 끊임없는 연구와 저술로 한국교회사 분야의 대가의 면모를 보여준 이덕주 교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많은 후속 연구가 이어져 선교사의 역할모델로서의 하디 선교사, 그리고 한국 대부흥의 도구로 쓰임받은 하디 선교사에 관한 재조명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김칠성|드류대학교에서 신학석사(M.T.S)를, 애즈베리신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교회 130년 역사에 묻고 미래에 답하다』,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이상 공저) 등이 있다. 목원대학교에서 선교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사상 2022년 2월호 (172~177페이지)

 

유성준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를 읽고-이후정 총장(감신대)

미래교회의 포괄적 대안 :

 

유성준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를 읽고

 

이후정목사 (감신대 총장)

 

그동안 세이비어교회 사역의 소개를 통해 한국 기독교에 많은 독자층을 가져온 유성준교수는 이번에 전적으로 새로운 포맷 속에 귀중한 노고와 함께 쌓아온 연륜과 경험을 담아 우리에게 선사하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온 것을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추천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평을 하려고 한다.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오던 때,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에 대해 조선의 백성들은 가히 폭발적으로 반응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 위험하다고 여긴 조정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통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독교가 확산되던 조선 말기, 조정이 사상적·철학적·종교적 통제력을 상실한 때에 기독교는 대중적 포교를 앞당기게 되었다.

 

조선 말기,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급속히 놀랍게도 전파된 것은 기독교에 대한 백성들의 열렬한 기대어린 반응과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단순한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시대를 선도하고 개혁하는 삶의 이정표였고 방향타였다. 특히 교회가 가진 평등성의 가치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변혁과 희망으로 가는 도약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교회는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교리 아래 많은 학교를 세워 차별 없이 배우도록 하고, 병원을 지어 아픈 이들을 치료했다. 이와 같은 만인의 평등성과 교육 및 의료선교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후 100년 넘게 지나온 한국기독교의 역사에 있어 크나큰 성장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평등성의 가치가 무색하게 교회에서는 섬김의 직분이라는 본질보다는 위계적 구조가 앞섰고, 교회의 진정성이 교인 수와 물질의 증대인 것처럼 외적 성장에 몰두했으며, 미신·광신·이단 등 잘못된 형태들로 성찰적인 신앙의 성숙을 외면했다.

 

그 결과 작금의 기독교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존귀함과 주체적 가치의 함양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사회적 공신력은 바닥에 떨어지는 실망을 가져왔다. 교회가 고유한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 시대와 사회에 소망을 주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기관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는 아픔도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코로나 19가 시작되고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몇몇 개신교가 보여 준 비이성적이며, 반사회적인 모습은 ‘개체교회 중심주의와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사회의 손가락질을 불러왔고, 불일 듯 타오르는 교회의 위기상황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믿는 자여 어이 할꼬”라는 찬양의 가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탄식처럼 터져 나오는 시대적 상황 가운데, 예언자적 내용을 담은 “유성준 교수의 새로 쓴 ”세이비어 교회 이야기”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 사람들이 열광하던 시대에 창출되었던 ‘진정한 교회(Authentic Church)’로서 갖추어야 할 원리와 요소들, 나아가 삶의 방법론과 실천 매뉴얼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 핵심내용을 정리해 본다면,

 

첫째, 균형성이다. 즉 영성과 사역의 균형이다. 이를 내적 여정(Inward Journey)과 외적 여정(Outward Journey)이라고 칭한다. 존 웨슬리는 궁극적인 목표를 예수그리스도의 대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Loving God and Neighbor)에 두고, 이를 위해 경건의 훈련(Works of piety)과 자비의 훈련(Works of mercy)을 실천했다. 이것이 세이비어교회의 핵심 목회철학인데, 참되고 진정한 내적 여정은 이웃과 사회를 향한 외적 여정으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피력하면서 다양한 실천방법들을 제공한다.

 

둘째, 다양성이다. 매우 다채로운 사역의 실천이다.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은총만이 복음의 진리이나, 그것을 잘못 전개한 결과 이분법적 절연에 치우쳐, 사회구원을 살피지 못하고 개인구원에 치중한 모습이 이 시대 한국교회의 주된 약점이 되었다. 세이비어교회는 내적 여정(Inward Journey)과 외적 여정(Outward Journey), 그리고 함께하는 여정(Journey Together)을 걷는다.

 

사역(Ministry)의 어원은 빼는 것(minus)을 함의하는데, 내가 없어지고, 비워지는 것이다. 세이비어교회의 대표적인 사역들은 토기장이 집 카페, 서번트 리더십 학교, 데이스프링 침묵기도 수양관, 노숙자병원 그리스도의 집과 카이로스의 집, 빈민주거사역-새 공동체 교회 등이 있다. 사역을 행하는 공동체는 10개로 흩어져 믿음과 섬김으로 함께하는 여정(Journey Together)을 걷는다. 생명의 빵 교회, 데이스프링 교회, 제8일 신앙공동체, 축제교회, 예수님의 친구들 교회, 희년교회, 새 공동체 교회, 구도자교회, 그리스도의 집, 그리스도의 교회, 지금 즉시 등이다.

 

셋째, 구체성이다. 수많은 사역들이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믿음과 열정으로 섬기는 사역에 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계화된 사역의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의 집-노숙자 병원, 카이로스의 집-노숙자병원과 연관된 재활 프로그램, 데이스프링 침묵기도 수양관, 믿음과 재정 네트워크, 어린이 사랑모임-양부모 사역, 희년 주거사역, 희년 직업소개 사역, 토기장이의 집 카페, 사마리아 주거 사역-중독사역, 시타 예능센터-빈민청소년 예능사역, 회복 카페 등 매우 고귀한 세이비어교회의 구체적인 사역 매뉴얼을 담고 있다.

 

넷째, 적용성이다. 이 책은 독특한 교회 한 곳을 단순히 알리는 정보에 그치지 않고, 다각적인 아이디어(Idea)와 프로토타입(Prototype)을 제공한다. 특히 ‘섬김’과 ‘종, 노예’를 의미하는 ‘서번트(Servant)’는 이제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함양하고 체계화해야 할 고유성과 필연성의 가치이다. 서번트를 각자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 맞게 적용과 실천을 모색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목회, 사역의 자리를 넉넉히 갱신하고 혁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방향성이다. 사변적인 이론에 그치지 않고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실제적인 이정표를 발견하게 한다. 단어, 문장, 문단 하나하나 정독하고 곱씹으며, 성찰하고 계획한다면, 이 책은 감추어진 보물과 값진 진주가 될 것이다. 코로나 시국이 지속되면서 교회가 처한 엄청난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 나라와 진정한 교회를 회복하고 맛보며 누리기 위해 이 책의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을 것을 확신한다. 시기적절하게 아주 좋은 책을 저술하여 한국 개신교에 또 한번의 경종을 울려준 유성준 교수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앞으로 이 책이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 신학도들, 나아가서 일반 평신도 등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을 믿고 소망하며 서평을 대한다.

 

http://m.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847

이후정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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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조현이만난사람

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하나님 떠나라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 자전 에세이 펴낸 홍인식 목사

지난해 순천중앙교회 담임을 사퇴하고 목회 현장을 은퇴한 홍인식 목사가 지난 6일 인터뷰에서 자전적 신앙고백서 <엘 까미난떼>를 쓴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홍인식(65) 목사는 밝고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이사장으로서 차별금지법 폐지를 주장해도, 보수 목사들조차 명랑한 그의 얼굴을 보면 험한 말을 접기 일쑤다.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멕시코, 한국 등을 떠돌며 산 방랑자의 낭만과 자유와 여유를 대하면 상대방도 완고한 무장이 해제되기 마련이다. 최근 스페인어로 ‘걷는 자’란 뜻의 책 <엘 까미난떼>(신앙과지성사 펴냄)에서 명랑한 겉모습과 달리 아픈 어린 시절까지 고백한 그를 지난 6일 서울 공덕동의 한 교회 카페에서 만났다.

스페인어 걷는 자 ‘엘 까미난떼’ 출간

부모 이혼·더부살이·남미 이민 등

성공·부자 갈망했던 성장기 아픔 첫 고백

한국인 최초 ‘해방신학’ 박사학위 받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등등

10차례 ‘꽃방석’ 자리 버리고 자유롭게

 

신앙과지성사 제공

 

홍 목사는 20대 때 신학대학원생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했던 영락교회에 전도사로 들어갔다. 이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주목받던 한인교회에서, 50대엔 서광선 이화여대 교수·한완상 서울대 교수·이삼열 숭실대 교수 등이 활동했던 서울 압구정동 현대교회에서, 올 초까지는 전남 순천의 장자교회인 순천중앙교회에서 각각 목회 활동을 했다. 그는 그런 ‘꽃방석’을 언제나 임기나 정년도 채우지 않고 박차고 나갔다. 지위에도 돈에도 매이지 않고 언제나 떠났다. 그쯤은 놓고 떠나도 뭔가 유복한 뒷배경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가 생애 처음으로 <엘 까미난떼>에서 고백한 삶은 ‘유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만 7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짐을 싸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빠 집으로 옮겼다. 엄마 집을 떠나는 차에서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리며 조약돌로 표시도 해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엄마 집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잃지 않으려 뇌리에 박았던 창 밖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아빠가 새엄마와도 이혼해 다시 짐을 쌌다. 옮긴 곳은 아빠를 ‘오빠’라 불렀으나 혈육은 아닌 ‘고모’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더부살이 5년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비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20일간 등교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전교 1·2등을 했지만 학교에서 쫓겨나던 날의 설움과 모욕감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어머니·누나·여동생과 함께 파라과이로 농업 이민을 떠났다. 가난을 벗어나려 고국을 떠나는 날, 너무도 울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도 기어코 성공해서 가난에 보복하겠다는 마음만은 굳건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파라과이에서 고교를 다니며 옷행상과 옷가게를 했고, 아순시온국립대학 경영학과에서 성공과 부자의 꿈을 키웠다.

그런 그가 한국인 최초의 ‘해방신학’ 목사가 됐다. 해방신학은 혼자 잘 사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1960년대 이래 남미에서 독재자들과 다국적기업의 부도덕에 맞서 로메로 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게 해방신학이었다. 그래서 해방공간 북에서 공산당에 의해 박해받고 남하해 친미·친독재의 길을 걷던 월남자들이 세운 영락교회를 비롯한 주류 교회의 보수적 크리스천들에 의해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비롯한 진보는 ‘빨갱이’로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북한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땅과 재산을 빼앗기고 남하한 아버지를 둔 그가 영락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해방신학자가 되리라곤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홍 목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방신학과 달리 마치 성령론자처럼 고백했다. 파라과이 한인교회의 환송을 받으며 “목사가 되어 다시 남미로 돌아오겠다”고 했던 그는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형교회인 영락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교인들을 심방할 때마다 신자들이 여비 봉투를 줘서 주머니는 늘 두둑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짝사랑했던 여성과 결혼해 ‘토끼 같은’ 아이들까지 생겼다. 가난한 파라과이로 돌아간다는 약속 같은 건 곧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미아리 산동네에서 할머니 권사가 봉투도 없이 꼬깃꼬깃한 5천원 지폐를 주었다. 마지못해 받긴 했지만 ‘내가 거지인가. 이따위 적은 돈을 주다니’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순간 머릿속에 뚜렷한 음성이 들렸다. ‘이가봇, 내가 너를 떠났다’는 성경 구절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소리에, 하나님이 아닌 봉투를 믿는 나를 발견하고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뒤 그는 짐을 싸 파라과이로 떠났다. 그곳에서 목회를 하다 몇년 뒤 아르헨티나로 옮겨 목회를 했다. 거기서 체 게바라의 친구인 세계적인 개신교 해방신학자 호세 미게스 보니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해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교수 겸 목사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잘 나가는 신성교회 담임을 할 때였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한인장로교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 지인이 그를 처음 만나는 목사에게 “아르헨티나에서 온 홍인식 목사님입니다”라고 소개했다.

“내가 그냥 목사인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목사고, 박사에 교수까지 하고 있는 성공한 목사라고 소개해야지, 그따위로 소개하다니’란 생각에 불쾌해하며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다시 ‘떠나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신성교회를 떠나 남미에서도 가장 열악한 공산국가 쿠바로 가 5년간 신학대학 교수를 했다. 이후 칠레에서도, 서울 현대교회에서도, 멕시코 신학대에서도, 전남 순천중앙교회에서도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다. 무려 10차례 뒤돌아보지 않고 ‘엘 까미난떼’가 됐던 그는 말했다.

‘신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신을 믿느냐’가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돈, 지위, 이데올로기, 명예를 믿은 건 아닌지…. 남미에서 평생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와 함께하며 군부 독재자에게 죽임까지 당하는 해방신학자에 비하면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14602.html#csidx2743552ce481a129656a07e3e891a25

로버트 하디 –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자, 원산의 기적이 시작됐다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자, 원산의 기적이 시작됐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

 

“하디 선교사가 수없이 ‘회개하라’고 할 땐 아무 반응이 없던 교인들이 ‘저부터 회개합니다’ 하자 기적처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무려 1200쪽에 육박하는 ‘영(靈)의 사람, 로버트 하디’(신앙과지성사)를 최근 펴낸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은퇴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 출신 감리교 의사 선교사로 1890년 조선에 온 하디(1865~1949)는 선교사, 신학 교육자, 신학 교재 60여 권을 쓴 저술가로 평생 한국 복음화에 헌신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을 이끈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원산 부흥 운동은 4년 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평양 대부흥’의 도화선이 된 사건. 그러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도 하디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03년 하디 선교사의 회개운동 이후 원산교회는 부흥했다. 새 건물을 짓고 기념촬영한 모습.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에 따르면 하디는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회개’가 뭔지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원산 부흥 운동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하디는 1902년 무렵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한국 선교 13년째, 원산 부임 10년째인 이때까지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인 집을 불시에 방문해 보니 술상을 놓고 교인 모임을 하고 있었고, 교인을 빙자한 횡령·사기 사건도 빈발했다. 하디는 ‘세례 교인’을 ‘학습 교인’으로 강등시키고 ‘제명’ ‘무기한 (예배) 출석 금지’ 조치도 내렸다. 선교 보고서에 “원산 교인들의 영적(靈的) 상태는 대단히 실망스럽다”고 적을 정도였다.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 내 로버트 하디 가족묘 앞에서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전기 쓴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극적 반전이 일어난 것은 이듬해인 1903년 여름. 휴가철을 맞아 외국인 선교사들이 휴양지 원산에 모여 기도회와 성경 공부 모임(사경회)을 열었다. 최고참 선교사 하디가 설교를 맡게 됐다. 그는 문득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모태 신앙이었지만 진정한 믿음이 없었고, 조선 교인들을 오만과 교만으로 대했음을 통회(痛悔)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 그동안 ‘조선 교인 탓’을 하던 하디가 ‘내 탓’이라고 고백하자 다른 외국인 선교사에 이어 조선 교인들로 회개의 불길이 번졌다.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갚지 않은 돈을 갚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졌고, 20년 전 본의 아니게 더 받은 봉급을 반환하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그 이전까지 ‘회개’는 무슨 뜻인지 감(感)도 못 잡던 조선 교인들이 비로소 회개의 참뜻을 알게 된 것이다. 부흥의 불길은 이내 원산에서 서울, 개성 그리고 평양으로 확산했다. 그 결과 불과 10여 년 후인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의 절반 이상을 개신교인이 차지할 정도로 개신교가 이 땅에 탄탄히 자리 잡게 됐다.

 

하디 선교사 부부(오른쪽)와 애비슨 선교사 부부. 하디 선교사는 좀처럼 웃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는 하디의 삶을 통해 개신교가 조선에 전해져 뿌리 내리는 과정을 꼼꼼히 재구성했다. 그는 “원산 부흥 운동의 본질은 ‘물질적 성장’이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본질적 변화였기에 가능했다”며 “코로나 시대를 맞은 한국 교회도 하디의 삶을 통해 무엇이 우선이고 본질인지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1949년 사망한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묘비. /신앙과지성사

 

2023년 원산 부흥 운동 120주년을 앞두고 하디 선교사의 전도로 세운 간성·강릉중앙·광희문·석교·수표교·양양·종교교회가 ‘하디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교) 본부와 감리교신학대가 평전 발간에 뜻을 모았다.

http://bit.ly/3gQCDr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