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트-스포츠맨십의 전도사

스포츠를 통한 복음 전도사,

반하트

 

이가람 경상국립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

 

 

한국 스포츠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에게 반하트는 익숙한 이름이다. 필자 역시 YMCA와 스포츠의 연계과정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반하트라는 이름을 매우 많이 접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의 이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조우하면서 잠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반하트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요람인 ​YMCA가 최초로 초빙한 한 체육지도자로서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에 근대 스포츠가 발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체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전수한 농구와 배구 등의 각종 근대 스포츠는 한국 청년들이 일본과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YMCA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한국인들이 잠시나마 울분을 표출할 수 있게 해 주는 원천이었다. YMCA에서 근대적인 스포츠 활동을 배운 한국 청년들이 운동장에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일본과 대결하고 일시적인 승리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YMCA는 국제적인 기독교 단체로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일본의 통제와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였고, 그곳에서 반하트는 한국인들에게 근대 스포츠를 직접 가르치고 전수하면서 한국 사회의 근대 스포츠를 통한 문명화에 앞장섰다. 반하트는 근대화된 신체 문화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 YMCA에 체육지도자로서 한국 청년들에게 신체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스포츠를 통해 젊은이들의 남성다움을 고취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스포츠는 신체적인 언어이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들은 새로운 문화와 언어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스포츠는 서양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을 친화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한국 야구의 시발점이 YMCA 야구단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예증한다. 야구는 한국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낯선 교회로 걸어가는 복음 티켓으로 이용되었다.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다양한 근대 스포츠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 향유되고 있는 주된 스포츠가 되었다. 농구와 배구도 반하트가 주축이 되어 YMCA를 통해 한국에 도입되었고, 현재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 문화로 자리잡았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교회와 스포츠가 결속된 연유는 바로 스포츠가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초의 YMCA 체육지도자였던 반하트의 생애를 정리한 책 『반하트: 스포츠맨십의 전도사』는 한국 교회사와 근대 스포츠의 결속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선교사들에 관한 연구는 많이 축적되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건너온 수많은 선교사들이 펼친 숨은 사역의 발자취가 연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 한 분야가 바로 YMCA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문명화와 복음적 사명을 실천한 선교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스포츠를 통한 문명화와 전도를 이룩한 미국YMCA 선교사들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절실하다. 미국YMCA는 초창기 영국YMCA와는 달리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기독교 확장을 위한 핵심적인 매개체로 활용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YMCA 체육 사업을 주도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저서는 YMCA 선교사들의 역사적 연구를 위한 새로운 지평과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저술한 임연철 박사는 반하트의 삶을 4부로 구성하고 있다. 1부 "체육선교사 준비기"에서는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 반하트의 성장과 결혼 과정에 대한 삶을 기록하고 있다. 반하트는 어린 시절부터 야성적인 에너지를 소유했다는 점에서 체육선교사가 되기 위한 선천적인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대학 시절에 농구팀의 선수와 대학 YMCA의 위원회를 경험하며 YMCA 체육지도자로 일할 수 있는, 영적∙신체적∙정신적으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농구는 YMCA가 발명한 스포츠 문화이다. 반하트가 학창 시절 YMCA가 창안한 스포츠 문화를 기반으로 스포츠 복음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가슴 속에 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2부에서는 YMCA 체육부 지도자로 내한한 반하트의 초창기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1916년은 한국 스포츠사에서 중대한 해이다. YMCA 가 한국 최초로 실내체육관을 개장하며 동시에 본격적으로 스포츠를 보급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로, 이를 통해 스포츠의 대중화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체육 교육을 전담할 책임자 반하트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반하트는 한국에 올 때 짐 속에 "농구공 1개, 야구공과 포수용 글러브 각 1개, 배구공 1개, 그리고 치료가 불가능한 스포츠 사랑 정신"을 함께 가지고 왔다.(85쪽) 스포츠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YMCA 지도자로서 내한 이후에 빠르게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동시에 거의 모든 운동 종목을 직접 코치하고 운영함으로써 체육 활동의 발전과 보급에 앞장섰다.

 

반하트를 통해 한국인들은 강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체육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반하트는 스포츠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활용되는 것을 넘어 스포츠를 사회적 개혁의 매개체로 인식했다. 그는 공정한 규칙 아래 건전하고 질서 있는 행동을 추구하는 스포츠 활동을 통해 문명화된 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다.(121~123쪽) 두 아들을 잃는 역경 속에서도 그는 청소년교육, 실업교육, 농촌교육 등에 헌신하며 한국 사회의 개선과 진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3부 "한국 봉사 후반기(1930~1940)"에서 저자는 서울YMCA 협동총무인 브로크만을 대신해 한국YMCA의 미국 측 책임자 활동을 수행한 반하트에 주목했다. 반하트는 이 기간에 한국 사회가 직면한 편향된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우려하며 YMCA가 영적으로 나라를 붙잡고,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출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천명했다.(199~200쪽) 국가적 위기를 하나님 신앙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반하트는 서양 근대 스포츠와 함께 씨름과 같은 전통 스포츠를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저자는 이 시기 반하트가 체육활동 이외에도 근대화된 공업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국 지역사회의 문명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흔적을 추적했다. 이를 통해 반하트가 일제강점기 근대적인 공업 및 농∙ 축업 기술과 경제관념을 직접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생활 개선과 발전을 이룬 숨은 공로자였음을 알 수 있다.

 

4부에서는 반하트의 퇴거와 방콕에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반하트는 전운이 감도는 식민지 공간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반하트가 한국에서 퇴거한 후의 삶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반하트는 잠시 휴식도 없이 하나님의 부름이 있는 태국으로 홀로 향했다. 위험한 발걸음이었다. 태국은 일본 제국의 야욕 속에 점령된 극동의 또 다른 공간이었고, 반하트는 일본의 탄압 속에서 젊음과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총성이 오고 가는 급박하고 위험천만한 공간에서도 반하트는 YMCA 총무로서 피난민 구제사업, 응급사업, 위생사업, 체육 활동 등을 주도하며 인류를 위한 선한 사명을 실천했다. 스포츠를 통해 다져진 남성다운 기독교인의 기질을 끝까지 유지하고 실천한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스포츠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YMCA 선교사들이 전개한 복음 사명의 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YMCA는 극동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에 동아시아의 기독교적 사랑과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YMCA 문명과 교육을 위한 유일한 공간으로 가능했고, 그중에서도 체육 사업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가장 유용한 다리였다. 반하트는 스포츠 복음의 설계자이자 실천가였다. 이 책은 저자의 집요한 사료 수집과 철저한 사료 검증을 통해 잊혀질 수도 있었던 반하트와의 역사적 대화를 실증적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평소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의 삶을 존경해 선교사 생애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있는 저자의 끊임없는 발품이 일구어낸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지만, 반하트라는 열정적인 스포츠 복음 전도사가 없었더라면 스포츠에 기댄 한국교회의 확장도 더딘 행보를 했을 것이며, 일제강점기 근대 스포츠의 발아도 미진했을 것이다. 스포츠의 묘미는 자발적 실천에서 나오는 즐거움에 있다. 필자는 이 책 속의 반하트를 보며 그가 복음 전도 과정에서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이끌려 스스로 온 극동에서 스포츠를 통해 즐거운 복음을 실천했다고 믿는다.

 

 

 

이가람 스포츠 문화사를 전공하였다. "미국 YMCA 역사에 숨겨진 아이러니: 교회의 세속화인가? 스포츠를 통한 복음화인가?", "Philip L. Gillett의 한국근대스포츠 발전에 미친 영향"등의 논문이 있다. 경상국립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Asian Journal of Physical Education 편집위원, 한국체육사학회 국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사상 2022년 3월호(164~169 페이지)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

평신도에게 위임하고, 소그룹으로 섬겨라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 유성준 대표

유성준 교수는 협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2005년 당시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평단)를 출판하여, 1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던 유 목사에게 큰 영향을 준 세이비어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는 “1947년 고든 코스비 목사가 워싱턴 북쪽의 빈민 지역 아담스 모르간(Adams Morgan)에 설립한 교회로, 영성(Inward Journey)과 사역(Outward Journey)의 균형을 강조하며 철저한 입교과정과 훈련과정을 정하고 지키며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이다. ‘세이비어(savior)’는 기독교에서는 ‘구세주’를 일반적으로는 ‘구제하는 사람’을 뜻한다.

유성준 교수는 23년의 미국 이민목회를 마치고 귀국한 후 15년간 협성대학교 교수와 교목실장으로 봉직했다. 2015년부터는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대표로 활동하며, 한국교회에 세이비어교회의 사역과 핵심철학을 전파하데 힘쓰고 있다. 올해 초에는 한국교회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곁들여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신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미국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등 소위 한국교회가 모델로 삼았던 많은 교회들이 사라지고 격변을 겪는 교계 현실 속에서, 오늘날 팬데믹으로 신앙의 지형이 완전히 변해버린 한국교회 상황에서 과연 세이비어교회 이야기가 아직도 유효할까. 연희동에서 유성준 교수를 만나 직접 들어보았다.

 

대표님의 신앙여정이 궁금합니다.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원주 51수송병원에서의 군대생활이다. 1976년 강원도 신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에 군인들을 위한 교육 위생병으로 파견되어 한 달간 농군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영성이 중요하지만,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처럼 복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것이 내 평생의 소명이자 신앙관이 되었다. 제대 후 입학한 협성신학교에서 김찬국 교수님을 만나 ‘정통실천신학 Theology of Ortho-praxis’의 중요성을 배웠다. 1981년 가을에는 협성신학교 첫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오클라호마 필립스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는다. 1985년 여름학기에 마지막으로 공부한 ‘청지기의 삶에 대한 과정Stewardship in Local and Global Context’을 통해 도심지 빈민가와 부유층이 사는 지역들을 두루 방문하면서, 크리스천이 세상을 위해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이애주 사모와 동역하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교회에서는 사례를 받지 않는 자비량 목회를 하기도 했다. 게렛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워싱턴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1994년 세이비어교회를 처음 방문하면서, 내가 신학을 공부하며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던 목회를 실제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교회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세이비어교회 산하 서번트리더십학교(The Servant Leadership School)에서 10년 간 공부하면서 핵심철학 다섯 가지를 배웠는데, 성경, 소명, 공동체, 영성과 기도, 마지막이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나는 이 핵심철학이 감리교회를 시작한 ‘웨슬리Wesley’의 ‘실천적 경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사역의 조화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세이비어교회에서는 통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책을 낸 계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세이비어교회의 설립자 고든 코스비 목사님을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워싱턴 빈민가에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큰 도전을 받았다. 2004년 모교인 협성대학교에 교수로 부름을 받아 한국에 오게 되면서 1년 동안 준비해 쓴 책이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양적 팽창, 외형에 치우침, 개교회 중심주의, 내부 지향적 체제 그리고 목회자의 명예욕과 재물욕 등 여러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새롭고 올바른 교회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세이비어교회를 소개한 것이다. 이번에는 코로나 상황까지 겹치면서,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요청하여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신앙과지성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세이비어교회도 75주년을 맞았습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의 은퇴와 소천, 사회상의 변화 등을 겪으면서도 그 탁월함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코스비 목사가 은퇴한 후 세이비어교회는 후임자를 정하지 않고 오히려 본부교회를 해체했다. 그동안 함께 사역하던 10개의 지교회 형태 사역공동체를 독립시켰다. 코스비 목사가 평소에 이야기 해오던 대로 “내적인 영성, 영성의 표출로서의 외적인 사역, 그리고 사랑과 책임 있는 공동체에 중점을 둔 작지만 밀도 있게 헌신하는 훈련된 사람들의 모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세이비어교회의 평신도 숫자는 150명을 넘긴 적이 없다. 세이비어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 한 시간 성경 읽고 기도하기, △2,3년이 소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학교와 서번트리더십학교 훈련과정 참여하기, △온전한 십일조헌금 드리기, △소그룹 미션그룹 모임에 매주 참여하기, △45가지 지역사회 사역 중에 은사별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 △자신의 삶의 전 지경을 포함하는 영적 자서전 쓰고 공동체에 발표하기 등의 까다로운 과정을 따라야 한다. 이런 입교과정은 일회성이 아니라 매년 갱신해야 한다. 세이비어교회는 지금도 △빈민 청소년을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일대일 멘토링과 과외 프로그램, △매년 천여 명 실업자들을 훈련시키고 취업시키는 취업사역, △미국 유일의 노숙자 병원인 그리스도의집,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역,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사마리아인 여인숙 주거 사역 등 지역에 꼭 필요한 45가지 관련 사역들을 펼치고 있다. 고도로 훈련된 평신도들의 소명과 동역 덕분에 또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지금도 그 사역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유성준교수TV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9C%A0%EC%84%B1%EC%A4%80%EA%B5%90%EC%88%98tv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철저한 영성과 지역사회 사역의 균형을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실현하는 세이비어교회의 서번트 목회를 대안으로 제시해 왔다. 신학을 가르칠 때도 그 지역과 현실에 맞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 워싱턴 빈민가에 최적화된 세이비어교회의 사역을 그냥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맞게 재해석해서 제공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국교회 상황 가운데 적용 가능한 보다 실제적인 사역 매뉴얼에 집중했다. 이제는 이론으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적용하고 변화해야 한다.

 

한국에도 세이비어교회처럼 서번트리더십을 실천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사회복지와 기독교 복지는 다르다. 기독교 복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아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내 안에 영성이 가득 차고 흘러넘쳐야 사역으로 드러날 수 있다. 고든 코스비 목사가 주장한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사역의 조화’도 같은 말이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해도 아무도 교회를 찾지 않는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 개척’이 아니라 ‘사역의 개척’이다. 일부 목사님들이 말하는 ‘마을목회’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지역의 필요를 중심으로 사역을 넓혀 나가는 세이비어교회의 사역과 다르지 않다. 이번 책에도 내가 임원으로 동역하고 있는 탈북민 자활을 위한 사회적 기업 ‘위로재단’ 이 펼치는 다양한 사역 등 실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나아가 책의 성격상 소개하지 못했지만, 세이비어교회를 모델로 한국의 상황에 맞게 목회하는 교회도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천의 김 목사 부부의 경우, 미국 세이비어교회를 방문하고 서번트리더십학교를 이수한 뒤 2003년 선한공동체를 시작했다. 청소년을 위한 주거공동체 및 밥차 사역 등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 서번트 목회를 하는 교회와 목회자, 평신도를 소개하는 책도 준비하고자 한다.

◇ 40여 년 동역해온 유성준 목사와 이애주 사모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교회는 목사 중심이다. 세이비어교회의 사역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다. 서번트 리더십이 교회의 목표 철학이 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위임’이다. 목사의 권한을 훈련시킨 교인들에게 위임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나 교회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소명에 따라 헌신할 수 있도록, 자발적인 소그룹을 만들어 사역할 수 있도록 세워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영성을 가다듬어야 하고 외적 사역을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에서 교육을 받는 분들은 목회자가 많은데, 앞으로는 평신도도 훈련원을 많이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회가 위탁을 의뢰해도 좋을 것이다. 당장 훈련원을 이용하지 못하더라도 이 책과 함께 <유성준교수TV>(유튜브)를 시청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출처 :이연경 기자(주간기독교)

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436

 

 

 

 

 

 

 

 

 

 

한국교회 대부흥과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로버트 하디

한국교회 대부흥과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로버트 하디

 

김칠성 목원대학교 교수

 

한국 개신교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성장과 발전의 밑바탕에는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다. 이렇게 한국 개신교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수많은 선교사들 중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1865-1949, 河鯉泳, 하리영) 선교사이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원산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한국 대부흥의 주역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디 선교사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1886년에 시작된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의 영향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과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1890년 조선에 입국하여 8년간 독립선교사(교단 파송을 받지 않은 선교사를 지칭)로 활동했다. 그 후 1898년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대부흥, 신학교육, 농촌계몽, 문서선교 등 다방면에서 한국 개신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은퇴한 이덕주 교수는 최근 하디 선교사의 전기를 서술한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를 펴냈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의 1장에는 하디의 출생과 선교사가 되기까지의 과정(1865-90), 2장에는 독립선교사로 활동했던 8년의 시간(1890-98), 3장에는 한국 부흥을 위해 기여한 내용(1898-1907)이 담겨 있다. 이어서 4장에서는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서 교수와 교장으로 활동했던 내용(1907-23), 5장에서는 문서선교, 농촌계몽운동, 남북감리교회 연합운동 및 그의 은퇴와 별세를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6장에서는 하디의 저술(논문과 단행본)과 그의 신학사상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선교사 하디가 다방면에서 한국 개신교 발전을 위해 기여한 내용을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다음의 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하디가 처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한국교회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인 저자의 풍부한 한국사 지식은 하디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과 일제강점기에 하디가 내린 결정을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그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연구는 매우 유용하다.

둘째, 이 책은 다양한 자료의 활용이 돋보인다.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로 시작하여 이후 미국 남감리교 소속으로 한국에서 무려 45년간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가 직접 쓴 글이나 그에 관한 내용이 캐나다, 미국, 한국 등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저자는 해외에 있는 자료뿐만 아니라 오래된 국내 자료도 발굴하여 하디의 생애와 활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특히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국내외 자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였기에, 후대 연구자들이 앞으로 하디를 연구할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예상된다.

셋째, 이 책에서 사용한 도표들은 독자들이 하디의 활동을 더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 책은 하디 선교사의 생애와 다양한 활동을 세세히 다루었기에, 그 서술 분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저자는 곳곳에서 도표를 통해 앞서 소개한 내용을 요약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부록에 실린 ‘하디 연표’는 하디와 그의 가족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연대기적 상황을 병기함으로써 하디의 생애와 활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첫째, 몇 가지 표현상의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1) 저자는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서 출생한 펜윅”(77쪽)이라고 그를 소개하며, 그 이후 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40쪽에서 펜윅을 하디, 에비슨과 같은 “감리교 신도들”로 표기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하디, 펜윅, 에비슨은 모두 캐나다 출신이고, 하디와 에비슨은 감리교 출신이지만(에비슨은 후에 장로교로 소속을 변경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됨), 펜윅이 감리교인인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2) 58-59쪽에서는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VM)의 영향의 일환으로 하디에게 선교적 자극을 준 인물인 존 포어맨(John N. Foreman)을 “목사”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디의 1914년 혹은 1934년의 글을 기반으로 작성된 내용이다. 하지만 존 포어맨은 당시 목사가 아니었고,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신학교에 갓 입학한 하디 또래의 젊은 신학생이었다. 아울러 67쪽에서 “목사”로 소개한 로버트 와일더(Robert Wilder, 1863-1938) 또한 당시에는 하디보다 두 살 많은 20대의 젊은 대학생이었다. 다시 말해 포어맨과 와일더 둘 다 후에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하디가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 이 두 사람을 목사로 지칭했지만, 하디가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던 1886년에 캐나다에 와서 해외선교자원운동을 펼쳤던 이 두 사람은 당시에 목사가 아닌 20대 청년이었다.

(3) 78-79쪽에서 저자는 펜윅에게 선교적 영향을 미친 “와일더 형제”를 로버트 와일더의 아버지인 로열 와일더(Royal Wilder) 목사(인도 선교사)로 보고 있다. 하지만 “와일더 형제”는 로버트 와일더가 맞다. 왜냐하면, 당시 로열 와일더는 자신의 아들이 대학교를 순회하면서 선교자원운동을 펼치기보다는 자신의 선교잡지 출판사역을 맡아주기를 바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버트 와일더 역시 인도 선교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인도에서의 경험을 이미 무디의 수련회에서 강연함으로써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4) 88쪽과 188쪽에서 저자는 제중원(초기에는 광혜원)을 “국립병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서울대학교(국립병원)와 연세대학교(선교병원)가 여전히 논쟁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필자가 보기에는 ‘왕립병원’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둘째, “부흥”이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개념상의 혼란이 보인다.

하디가 한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부흥이다. 그런데 저자는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개념을 포괄하거나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특히 “부흥운동”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먼저, “부흥”을 교회의 성장과 번영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276쪽에서는 부흥을 성장과 동의어로, 277쪽에서는 “부흥과 성장,” 그리고 310쪽에서는 “부흥이나 성장”이라고 표현하고, 438-439쪽에서도 “부흥, 성장”, “부흥과 성장”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347쪽에서는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 규모가 커지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신도와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이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원산 부흥을 “거룩한 회심운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373쪽에서 하디가 윤성근에 관해 기술한 영어 원문을 번역하면서 저자는 ‘prosper’(번영)를 “부흥”으로 번역하였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오직 교회가 부흥되기만 바랐습니다.”(He loved the Church, and his whole desire was to see it prosper.)

 

그러나 필자의 이전 연구[“하디의 회개, 부흥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선교신학」 제32집(2013): 175-199]에서 이미 밝혔고, 1923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2월 부흥회 주제가 “성령세례”였듯이, 부흥은 회심(conversion)이나 교회성장(church growth)이 아니라 바로 “성령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의미한다. 특히 ‘부흥운동’(revival movement, Revivalism)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이전의 다른 연구[“원산부흥, 일반부흥인가, 대부흥인가” 「한국교회사학회지」 제34집(2013): 253-283]에서 밝혔듯이, ‘부흥’과는 전혀 다른 “전문적인 대중전도”(professional mass evangelism)(에드윈 오르, Edwin Orr) 또는 “부흥 혹은 회심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안 머레이, Iain H. Murray)으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디가 말하는 부흥은 교회성장이나 회심을 위한 전도운동을 의미하지 않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경험한 기존 신자들에게 “성령의 부으심” 또는 “성령세례”가 임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성화된 삶을 살아가며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 있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부흥에 관한 용어를 사용할 때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일반부흥과 대부흥의 차이, 그리고 원산 부흥과 평양 부흥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 관한 필자의 연구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셋째, 네비어스 선교방법에 관한 하디의 입장을 서술한 부분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저자는 358-359쪽에서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 이후에 토착인에 의한 전도활동(self propagation)과 자립운영(self support)을 언급하면서 “네비어스 선교방법”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네비어스 선교방법론은 감리교에서 채택한 선교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디와 연관 짓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하디가 행한 일에 네비어스적 방법론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디가 네비어스의 방법론을 따랐다고 말하기는 어렵기에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관해서는 최근에 발표한 필자의 연구[“한국선교 초기 감리교와 장로교의 교회성장 비교연구”, 「선교신학」 제64집(2021): 166-192]를 참고하기 바란다.

 

은퇴 이후에도 끊임없는 연구와 저술로 한국교회사 분야의 대가의 면모를 보여준 이덕주 교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많은 후속 연구가 이어져 선교사의 역할모델로서의 하디 선교사, 그리고 한국 대부흥의 도구로 쓰임받은 하디 선교사에 관한 재조명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김칠성|드류대학교에서 신학석사(M.T.S)를, 애즈베리신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교회 130년 역사에 묻고 미래에 답하다』,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이상 공저) 등이 있다. 목원대학교에서 선교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사상 2022년 2월호 (172~177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