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꿈꾸던 광복 이룬 코리아 자랑스러워

“할아버지 꿈꾸던 광복 이룬 코리아 자랑스러워”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 한국 찾아 건국포장 대리 수훈

 

 

 

 

 

우리암 선교사의 4대손 그라프톤 윌리엄스(왼쪽)씨와 3대손 알프레드 윌리엄스(가운데)씨, 델리 윌리엄스(오른쪽)씨를 14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만났다.

 

아들 이름을 광복이라고 지을만큼 대한민국의 해방을 꿈꾼 미국인 선교사의 업적이 조명됐다.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국인 우리암(Franklin E. C. Williams, 1883~1962) 선교사와 아들 우광복 선생(George Z. Williams, 1907~1994)의 후손들이 한국을 찾았다.

사단법인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서만철 박사) 산하의 우리암·우광복선교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에 이어 우리암 선교사의 후손들을 한국에 초청했다. 올해는 우리암 선교사에 대한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의 건국포장 수훈을 계기로 방한이 이뤄졌다. 10명의 후손이 대리 수훈을 위해 지난 11일 입국했다. 14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과 우리암 선교사의 3대손인 델리(Delee Willams)씨와 알프레드(Alfred Willams)씨, 4대손 그라프톤 윌리암스(21·Grafton Addison Willams)씨를 만났다.

우리암 선교사는 충남 공주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1909년 영명학교를 세우고 독립유공자 유관순 열사를 키워낸 인물이다. 1906년 공주로 온 이후 1940년 강제 추방될 때까지 34년간 공주를 비롯한 충남 지역에서 교육과 선교를 전개했다.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을 지낸 조병욱 지사와 유관순 열사의 오빠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우석 지사 등이 영명학교 출신이다.

우리암 선교사는 한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첫아들 조지의 이름을 우광복으로 짓기도 했다. 우광복 선생은 14살에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의 광복 소식을 듣고 돌아와 군의관으로 자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을 했다. 서 회장은 “미 군정에서 일할 50명의 한국인을 선발할 때 우광복 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선발된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3대손 델리씨는 자신이 기억하는 할아버지 우광복 선생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14살까지 살았던 우광복 할아버지는 본인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컸다”며 “제가 어렸을 때까지도 한국과 미국의 경제 격차가 매우 컸다. 할아버지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계없이 한국인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열정적인지를 알려주셨다”고 소개했다.

우광복(사진 오른쪽) 선생과 손자들. 사진 가장 왼쪽이 델리 윌리엄스씨, 우광복 선생 바로 앞이 알프레드 윌리엄스씨다. 델리 윌리엄스씨 제공

 

델리씨의 동생 알프레드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할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단번에 이해했다”며 “할어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 대해 알리기 위해 무척 노력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윌리엄스라는 이름이 미국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인데 지난해에 이어 이렇게 한국에 오면서 우리 가족들이 윌리엄스라는 이름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며 “우리 조상의 업적을 발견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나서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4대손 그라프톤씨는 “지난해 한국에 오기 전까지 선조들이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들인지 몰랐다”며 “한국이 광복을 이룬 뒤 이렇게 발전하고 교회가 많이 세워져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라프톤씨는 “더 늦기 전에 선조들의 업적을 배우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할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해서 자녀들에게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엘프레드씨는 “공주에 우리암 우광복 기념 박물관 건립이 논의되고 있다고 들었다”며 “예산이 많이 들 텐데 우리 가족도 그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 이바지하며 선조들의 한국 사랑을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해 우리암 선교사 후손 한국 초청 행사에서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 알프레드 윌리엄스씨 제공

 

한편 15일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에게 직접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윤 대통령은 “1908년 입국한 미국인 선교사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은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며 “1943년 인도 전선에서 광복군의 한·영 연합 작전을 도왔고 광복 직후엔 미 군정청의 농업 정책 고문으로 발탁돼 활동했다”고 업적을 소개했다.

서만철 회장과 임연철 전 국립극장장이 지난해 펴낸 책 ‘우리암과 우광복 이야기'(밀알북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8567297

“6·25전쟁, 한국만 아닌 자유주의 승리 위한 싸움”… 그의 사기 고취로 참패 피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비망록 ‘한국전쟁’
미군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 56년 만에 번역
여성 종군기자 히긴스, 선교사 포로 젤러스 등
한국전쟁 다룬 책 잇따라 출간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무엇보다 전투의지 회복과 자긍심 고취가 시급하다고 봤다.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가 전방지휘소를 방문해 야전 지휘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리지웨이는 이후 유엔군사령관까지 오른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마침내 대규모 포성과 함께 한반도에 전면전 발발 신호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우리가 탄생시킨 약소국 대한민국은 자신들이 저항 시늉만 할 뿐 싸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도 상호 지원한다는 과거 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 군사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6·25전쟁을 이끈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유엔군사령관은 자서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 영웅 맥아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에 견줘 명성이 특출나지는 않다. 그러나 3년간의 한국전쟁 중 2년가량 군을 이끌면서 한반도 적화통일을 저지하고 휴전선 위치까지 전선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지휘관이 그다. 리지웨이가 1967년 출간한 한국전쟁 징비록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이 출간 56년 만에 뒤늦게 번역됐다. 전쟁터를 누빈 여성 종군기자,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국인 선교사가 쓴 한국전쟁 책도 전쟁 발발 73년, 정전 70년을 기념해 출간됐다.

 

매슈 B 리지웨이 지음ㆍ박권영 옮김ㆍ플래닛미디어 출판·355쪽ㆍ2만5,000원

리지웨이가 1950년 12월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유엔군은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동안 북진을 이어갔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며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뺏기고 남하했다. 국군·유엔군에서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힘들다는 패색이 짙었다. 미군·유엔군에서는 “왜 우리가 낯선 땅에서 싸우다 죽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리지웨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사기를 고취하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21일 전 장병에게 지휘 서신을 내려보낸다. “이것은 동맹국 한국의 자유와 국가 생존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다. 어떤 군 사령부도 우리보다 더 큰 도전을 하거나 우리 자신과 국민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펴낸 플래닛미디어 이보라 편집장은 “한국전쟁은 우리의 전쟁인데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과오는 온데간데없고 이념만 남아 있다”며 “미국 입장의 책이지만 우리가 전쟁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또 승리를 이끌어내기까지 어떤 감동적 과정이 있는지 읽을 수 있는 역작”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 헤럴드트리뷴 소속 기자였던 마거릿 히긴스가 한국전쟁을 취재하고 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의 표지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성으로선 최초로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에서 수상했다. 오른쪽은 히긴스가 맥아더 장군과 대화하는 모습. 아마존 캡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가 지은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은 전쟁의 긴박함과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 책이다. 뉴욕 헤럴드트리뷴 도쿄지국장이던 히긴스는 전쟁이 나자 이틀 만인 6월 27일 서울로 날아왔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강 인도교 폭파·낙동강전투·인천상륙작전·서울수복 현장을 직접 목격한다. 서울수복 이후 명동성당을 찾은 후엔 이렇게 썼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대신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이 우리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미국을 비판했다.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본국이 전쟁의 참상을 알아야 병력과 물자를 원활히 공급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을 향한 히긴스의 평가는 이렇다. “전쟁 중 한반도에서 많은 비극이 발생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것이 자유세계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우리는 지금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국제적인 자명종 시계 역할을 한 것이다.”

 

임연철 번역ㆍ밀알북스 발행ㆍ372쪽ㆍ2만5,000원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를 그린 그림. 상하이 사립 미술관인 룽(龍)미술관에 전시됐다. 연합뉴스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가 쓴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이라는 혼돈에 빠진 민간인의 고통과 절망을 알려주는 저술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당일 북한군 포로가 돼 3년 전쟁기간 내내 인권을 유린당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공군 무전병으로 참전한 경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국군·유엔군의 북진으로 한겨울에 북한 만포와 중강진 일대를 도보로 올라가는 ‘죽음의 행군’을 시작한다.

추위, 굶주림, 북한의 즉결 처분으로 미군 포로 700명 중 500여 명, 민간인 포로 75명 중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젤러스와 함께 살아남은 민간인 포로 50여 명은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했고, 미군 포로는 겨우 250여 명만 생존해 휴전협정 후 석방된다. 번역자는 후기에 이렇게 썼다. “조명되지 못하고 묻혀 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잊혀 가는 내한 선교사의 숭고한 업적을 한 분이라도 더 발굴해야 한다.”

정지용 기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62509250000122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의 6·25 회고록
당시 北포로였던 미국 선교사 수기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 박권영 옮김 | 플래닛미디어 | 356쪽 | 2만5000원

 

 

적의 손아귀에서
래리 젤러스 저 | 임연철 편역 | 밀알북스 | 372쪽 | 2만5000원

“한국군에는 북한군처럼 중국에서 전투 경험을 쌓고 돌아온 인적 자원들이 거의 없었으며, 현대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 교육받은 인원들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무엇보다 한국군 내에서는 ‘체면’이 가장 중요했다. 한국군 장교들은 자신들보다 계급이 낮았던 미군 고문관들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별세한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한반도의 6·25전쟁에 참전한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장군의 회고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군은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군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을 폄훼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남한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고 가정에 헌신적이었다. 한국군에게 부족한 것은 싸우려는 의지나 용기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체계적이고 강한 훈련과 훌륭한 리더십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6·25 발발 73주년과 정전 70주년을 맞아 미국인의 시선으로 6·25전쟁을 본 회고록 두 권이 출간됐다.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해임 이후 유엔군사령관에 오른 리지웨이 장군의 6·25전쟁 회고록이고,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미국인 선교사의 수기(手記)다.

리지웨이는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우리가 간과해 왔던 전쟁의 중요한 지점을 짚는다. 그가 통탄한 것은 한국군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1951년 1월 1일 아침에 서울 북쪽에서 마주친 미군 장병들은 개인 소총과 공용 화기를 모두 버리고 사색이 된 채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중공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리지웨이가 보기에 한반도에서 제대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폭탄과 유엔을 믿은 미국은 심리적으로 안주한 채 성급하게 군사력 단축을 단행했고, 설사 전쟁이 발생해도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다.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둔 1950년 12월, 더글러스 맥아더(앞줄 오른쪽) 사령관과 함께 전장을 순시하는 매슈 리지웨이(앞줄 가운데) 장군.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를 반복적으로 무시한 끝에 해임된 맥아더를 비판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리지웨이의 역할은 패배주의가 만연한 미 8군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일이었다. 예하 부대 지휘소를 방문해 장병들의 태도와 대화 내용,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전투 의지를 들여다봤고, 전투의 의의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어떤 경우라도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데려간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전투 의지를 고취하고 위력 수색과 공세 작전을 펼친 끝에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38선 이북까지 회복해 한반도의 적화 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리지웨이는 지휘 서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자유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서구 문명의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물리칠 수 있느냐, 아니면 포로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며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리지웨이의 말이 거짓말이거나 과장이라 의심된다면 ‘적의 손아귀에서’를 읽어볼 만하다. 개성 송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는 6·25 발발 당일 북한군의 포로가 돼 평양의 수용소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북한군은 민간인 포로 75명을 미군 포로 700명과 함께 평북 만포로 이동시켰는데, 북진 속도가 빨라지자 만포부터 더 북쪽 길을 한겨울에 걷게 하는 ‘죽음의 행군’이 시작됐다.
대부분 여름에 붙잡혀 얇은 옷밖에 없는 포로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의 한파 속에서 200㎞ 산길을 걷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미군 포로 낙오자 중 인민병원으로 보내준다고 속인 뒤 사살한 인원만 200여 명이었다. 결국 미군 포로 약 500명과 민간인 포로 20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아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고통을 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사라졌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제도를 향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제도일 뿐이다.”

유석재 기자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3/06/24/3MLGKAFF2NEGTLE4MSXOQK7WQA/

10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난지도 성자-人間 황광은

10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난지도 성자
人間 황광은
김희보(1권), 황광은(2권) 세트, 영암장로교회 엮음, 신앙과지성사, 2023

 

 

10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난지도 성자

(<인간 황광은>, 김희보, 신앙과지성사, 2023)

1.
난지도의 성자 황광은 목사가 다시 돌아왔다. 2023년 2월 19일, 영암교회는 매우 부산했다. 고 우신 황광은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예배가 열렸기 때문이다. 영암교회 신도들은 100년 만에 다시 오시는 담임목사님을 맞이하기에 분주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관계자는 물론, 한국보이스카우트 연맹, 서울 YMCA, 삼동소년촌(서울 상암동 소재 황 목사가 개척한 사회복지 시설), 대광중고 동창회 관계 인사들이 점심 식사 이후에 줄을 이었다. 유상진 담임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1부 예배 서두에서 이 교회 연합성가대원(약 100명은 될듯하다)이 헨델의 할렐루야를 부르며 100년 만에 다시 오시는 담임목사님을 맞이했다.

제1부 기념식은 100세가 훌쩍 넘은 한국의 지성 김형석 교수께서 후배 황광은의 100년을 축하하고, 온화한 성품과 밝은 미소의 황 목사를 기억했다. 위의 소개한 단체의 관계자들과 친지들 10여 명이 줄을 이어 황광은을 추모했고 3시간 가까운 집회는 줄을 잇는 황광은의 사랑과 섬김의 이야기로 전혀 동요됨이 없이 진행되었다. 간단히 터져 나온 회중들의 박수와 웃음소리는 황광은을 더욱 그립게 했다.

특별히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와 단원들이 경례하면서 고인에게 봉사대장 훈장을 추서했다. 그의 차녀인 황은숙은 유족인사를 하는 동안 눈물을 계속 흘렸고, 그의 사위인 김정호 목사는 그 광경들을 카메라로 연신 찍어댔다. 그날 내 자랑스러운 친구인 김정호 목사(뉴욕 후러싱교회 담임)는 세 번의 주일 설교를 아침 7시부터 담당하여 이 행사에서는 순서 없이 사진만 열심히 찍어 마누라에게 노후가 편할 건수(?)를 하나 만들었다.

고맙게도 영암교회는 이 자리에서 이 책들의 출판을 담당한 신앙과지성사의 공로를 치하하는 감사의 꽃다발을 대표인 나에게 전해주었다. 다과회까지 마치니 저녁 7시가 훌쩍 넘었다. 53년 전에 돌아가신 담임목사를 이렇게 극진히 추모하다니, 이 행사는 한국교회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훈훈한 미담을 제공한 행사였다.

2.
이렇게 한국교회에 귀감이 되는 행사와 출판작업에 기여한 주역은 압구정동에서 오랫동안 ‘사랑의치과’를 운영하는 장지우 장로다. 장 장로님은 1년이 넘도록 원고를 넘긴다고 여러 번 전화했지만 노구를 이끄시고 쉽지 않은 일이려니 하고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어휴, 80을 바라보시는 연세에 원고를 마련하시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겠나 싶어 2022년 추석을 앞둔 상쾌한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덕수궁 옆 ‘달개비’에서 반갑게 장 장로님을 만났다. 젊은이들도 쉽지 않은 원고 작업을 오래도록 하셨으니 그에 대한 치하의 뜻으로 좋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멀리 있는 김정호 목사의 장인의 원고이니 친구를 대신해서라도 대접하고픈 생각이 들었는데 장 장로님은 큰 배낭으로 한 짐 되는 원고를 내미는 게 아닌가! 하여, 아니 요즘 USB나 이메일로 원고를 주지 누가 이렇게 한 짐의 원고를 주느냐면서 살피니, 황광은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다 복사하여 수집한 것이었다. 와-, 이걸 어쩐다, 그러나 스승을 생각하시는 열정이 너무 값져서 즐겁게 식사하고 출판사로 모셔서 세월의 흔적이 고고한 원고 설명을 들었다.

장지우 장로는 대광중학교 1학년때 황 목사님을 만났단다. 곧 영암교회 담임으로 가셨는데 그분을 선생님으로 존경했기에 그 교회로 따라갔단다. 영암교회에서 10년 목회하시고 47세 너무 이른 나이에 황 목사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53년이 되도록 장지우 장로는 선생님 같은 담임목사님을 그리며 이 교회를 지켰다. 치과의사가 되어 어려운 이웃도 많이 돌보았고, 황 목사님의 호를 딴 우신장학회도 중추적으로 이끌어 왔는데, 이렇게 황광은 목사님께 영향받고 사는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그의 아들도 레바논으로 부인과 함께 떠나서 치과 진료 봉사를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예수의 사랑으로 짧은 생을 살다 간 황 목사의 정신은 이렇게 대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진정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의 칭송이 아니라 예수 사랑의 길이기에 老 장로인 장지우 장로의 열정에 우렁찬 박수를 보낸다.

3.
그렇게 시작된 이 책의 작업은 6개월이 넘어섰다. 잘 파악도 하기 힘든 악성(?) 원고를 입력부터 교정, 교열까지 다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치과의사로 바쁜 장 장로님이 군밤 봉투를 앞세워 출판사를 출입하는 횟수가 잦아들었다. 그때마다 추가되는 원고를 또 어딘가에서 찾아와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마다 페이지는 바뀌고 난감한 일이 벌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고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책인데 첫권은 김희보 선생이 쓰신 『인간 황광은』을, 2권은 아동문학가요 수필가이며 능력의 부흥사였던 황광은 목사님의 동요, 동화, 수필, 설교를 모아 구성했다. 이 책이 예쁜 케이스에 나란히 담겨 품격이 있는 크리스천 홈을 빚내줄 것이라 믿는다. 짧고 굵게 산 한 성직자의 헌신적인 삶이 오롯이 담긴 책을 또 한 권 출판하여 기쁘다.

4.
현재 뉴욕 훌러싱교회를 맡아 좋은 목회를 하고 있는 김정호 목사는 나의 오랜 친구다. 광현교회 서호석 목사와 만날 때마다 우리 시대 어른이 없다, 의논드리고 고뇌를 털어놓고 상의할 어른들이 다 돌아가셨다고, 쓸쓸한 대화를 여러 번 나누었다. 그래서 서로 협력하여 나온 책이 <사랑하며 춤추라>이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이 어른들을 만나게 해 드리자!” 하고 예수의 삶을 살아낸 대천덕, 장기려, 원경선, 김용기, 조아라, 나애시덕, 황광은, 이현필, 여덟 분 어른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머리글을 김정호 목사에게 쓰도록 했다. 김 목사는 황광은 목사의 신앙과 삶도 썼지만, 이 책의 서문에서 “어른이 없으니 아이들끼리만 싸우는 사회가 되었다. 곁눈질에 익숙하거나 땅에 떨어진 것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면서 예수와 함께 사랑하며 춤추자”라고 말했다.

황광은 목사(1923-1970)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이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 기쁘고 산파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에 출판인으로 긍지도 가지게 되어 감사하다. <사랑하며 춤추라>의 전체 발문을 써 준 김기석 목사의 말대로 황광은 목사님은 우리 인생의 표지판이다. 우리 인생을 제대로 견인한 표지판 위에서 신앙의 어른들과 함께, 황광은 목사님과 함께, 사랑의 춤을 추어 보는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랑의 시대 예수와 함께 걸어갈 때 용기를 주는 책이다.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큰산 큰 믿음의 사람이 펼치는 봄·여름·가을·겨울

큰산 큰 믿음의 사람이 펼치는 봄·여름·가을·겨울

바위 주대범의 교회음악 산책

주대범 지음/ 신앙과지성사/ 2023

 

1.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들을 불효자라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친구보다 더 먼저 간 사람을 나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출판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40년이 된다.

많은 책을 냈다. 그런데 갑자기 죽어간 주대범 장로의 유고집 『바위 주대범의 교회음악 산책』은 정말 쓰린 마음 추슬러 가면서 만든 책이다.

주 장로는 성격이 활달하기로 소문났다. 불의를 보면 제일 먼저 분개했고, 친구들의 아픈 현실은 누구보다 슬퍼했다. 나의 경우는 잘한다는 게 겨우 책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이라면, 주 장로는 재주가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국어 선생님 출신이라 글도 잘 썼는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루터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명성이 높았다. 가끔 전화해서 친구의 기를 살려주던 주 장로가 내게 진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2020년 11월로 기억된다.

“야, 최 장로 이번 몰트만 박사의 책은 제목이 너무 좋아”

“그래, 기독교인들에게 팁을 준다고 생각하고 붙였지. 당신은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물으면 이 책 제목처럼 『나는 영생을 믿는다』라고 얘기하면 되잖아?”

“그래서 초판이 보름 만에 다 나갔다고?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음악 출판사를 3년 만에 문 닫았는데, 네가 꾸준한 것은 참 신통하다.”

주 장로는 몰트만 박사의 마지막 저서 『나는 영생을 믿는다』란 책이 신앙과지성사에서 나온 것이 반가웠고, 또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 2021년 1월 29일, 이 통화를 하고 두 달이나 지났을까 주 장로가 세상을 떠났고, 영생 이야기가 마지막 통화가 되었으니 어찌 나쁜 친구가 아니겠나. 온 동네 근심 걱정 혼자 도맡아 했던 주대범 장로는 코로나가 지배했던 세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 침대 신세를 일주일 밖에 지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 주 장로는 전화 말미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 장로, 내 책 『교회음악 산책』은 꼭 너희 신앙과지성사에서 내 줘야 해!”

 

2.

친구의 마지막 부탁은 그의 죽음 2주기에 실현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이정배 박사와 그의 처남으로 열심히 낮은 곳에서 목회하는 윤인중 목사와 셋이서 여러차례 만났고, 이 두 사람은 원고정리와 책의 꼴을 만드는데, 열심히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책은 저자 주대범처럼 두툼하고 듬직하게 생겼다. 자그만치 584쪽이다. 자비롭게 웃고 있는 사진을 표지에 썼는데, 친구를 맞이하는 반가운 미소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2023년 1월 29일 그가 섬겼던 후암동의 루터중앙교회에서 이 책 출판기념예배가 있었다. 많은 지인이 찾았고, 추모의 순서도 정갈했다. 나에게 발행인의 인사를 하라고 하여 나는 두서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구 주 장로의 원고를 정리하고 출판 준비를 하면서 나는 상상했습니다. 하루는 광나루 건너 밀밭길을 개나리봇짐 하나 지고 거니는 주대범을, 하루는 이필완과 같이 갔던 지리산 자락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개나리봇짐을 만지작거리는 주 장로를 연상했습니다. 그 개나리봇짐을 풀어보니 오늘 책이 된 원고 뭉치였습니다. 이제 그 짐이 책이 되었으니 빈손으로 아주 편하게 훠이훠이 영생의 길을 가는 주 장로의 모습을 연상합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영생의 길을 먼저 떠난 주대범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목이 메어서 더 말하지 못하고 서둘러 인사말을 마쳤다. 이필완과 주대범과 나 셋이서 담양을 거쳐 지리산 자락에서 1박 한 적이 있다. 그때 여행목적은 우리밀로 빵집을 시작한 감청후배 노재화 목사가 빵집 마무리를 위한 돈이 없어 의자와 탁자를 시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격려할 겸, 바람 쐘 겸 떠난 것인데, (그때 내가 노 목사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주 장로는 자기가 후원한 것보다 더 기뻐하면서 기분 좋아라 했는데, 곧 기회를 만들어 울릉도와 독도를 셋이 같이 여행하자고 약속하며 들뜬 마음으로 귀경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말로 인사말을 마치고 싶었다. “이 책 가지고 꼭 울릉도와 독도를 가서 빨간 줄 쳐놓은 주 장로의 멋진 주장을 큰 소리로 읽어 줄게!”

 

3.

이 책 뒤표지만 봐도 주대범 장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알 수 있다. “휘황찬란한 교회당에 맘몬과 배타와 상스러운 것들만 가득한 채 버려져 있을 우리의 교회를 걱정하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교회음악 산책길을 떠난다. 20년 이상 한국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신사도운동격인 ‘경배와 찬양’, ‘워십’, 감각적인 미국 성가곡만 부르는 경박함, 현세의 축복과 번영을 빌고 있는 구걸가들은 이제 버려야 할 것들이다. 한국교회 안에 복음적이고 성서 정신에 합당한 노래들이 다시 담겨야 한다. 삶 속에서 늘 도전받으며 어려워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현하려는 찬송이 회복되어야 한다. 품격있고 균형 잡힌 교회음악이 꽃피워져야 한다. 위의 주장을 1부 교회음악 산책으로, 2부를 그의 일기로 구성했다.

그의 일기에는 고뇌하는 한 평신도의 삶의 이야기와 생활신앙의 실천, 그리고 나눔의 기쁨으로 요약된다. 군데군데 좋은 말이 자주 눈에 띈다. 그를 덧없이 떠나보낸 지인들의 추모의 장도 눈시울을 적시게 하지만, 책 편집이 완성될 무렵 날아온 이현주 목사님의 권두시는 죽음을 너머 고통을 넘어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을 더욱 애처롭게 뒤돌아보게 한다.

 

그 사람(이현주)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
풀을 노래하고 있었지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사람
풀처럼 살고 있었어
마지막 보았을 때 그 사람
한 포기 풀이었네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
별을 노래하고 있었지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사람
별처럼 빛나고 있었어
마지막 보았을 때 그 사람
한 떨기 별이었네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
길을 노래하고 있었지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사람
길 따라 걷고 있었어
마지막 보았을 때 그 사람
외줄기 길이었네

– 고 주대범 장로 2주기에

한국근대화의 산파, 선교사 3천 명의 기록

한국근대화의 산파, 선교사 3천 명의 기록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발행, 신앙과지성사 제작, 2022

 

1.

혈기만 왕성했던 나의 감청 시절, 지금의 광화문빌딩은 감리회관과 국제극장을 합하여 지어졌다. 거의 감리회관에서 살다시피 했던 청년들은 감리회관 인근이나 그 건물 지하다방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미국인 선교사 마태진 목사님이다. 마 목사님은 청년들에게 우호적이고 도움도 주었으나 그런 마 목사님을 청년들은 ‘미국 스파이’로 “왜 자기 나라에 가서 놀지 여기 와서 탱자 거려”라는 험한 말을 수시로 했다. 군부독재 시절이라 광화문을 활보하고 다니는 마 목사님 무리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었다. 교회사를 공부한 청년 중에는 마 목사님을 일제 강점기 조선감리교회를 좌지우지했던 웰치 감독이 떠오른다면서, 웰치 감독은 조선의 독립이나 조선감리교회의 자주성에는 관심이 없고, 일본에 아부하면서 “정치는 귀국이, 우리는 오로지 구령사업에만!”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교단을 치리했던 것을 스터디 중에 말하면서 참여했던 청년들과 분노의 공감대를 나눈 기억도 있다. 물론 지금은 미국 고향에서 생사를 오가는 마 목사님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 역시 나이 들어가면서 나의 출판작업 중에 유독 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책을 많이 내게 되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을 혹평했던 내가 선교사들의 평전을 계속 내게 되다니! 물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게 된 이후였지만 옛날의 철없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2.

한국교회가 복 받은 교회라는 것을 나이 들며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 땅을 찾아온 선교사들 중 헌신적이면서도 의식 있는 분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대명사가 된 두 분의 삶과 신앙은 지금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어찌 되었을까, 한국교회는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제 어느덧 나이가 들었다. 교회에서는 수석장로란다. 자그만 교회를 섬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과 다른 모함을 들을 때면 역정부터 난다. 그런데(일일이 이 두 분 선교사의 업적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는 그분들처럼 헌신성이 있는가, 믿음과 사랑이 있는가, 반문해 본다.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앞잡이고, 역사의식이 빈곤하여 일제와 독재정권에 부양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보다 큰 의미를 위한 성찰을 통해 정리되어야 할 단편적인 일이다.

 

3.

유독 연희동 칼국수를 좋아하시는 임연철 박사님과 가깝게 되었다. 나는 ‘사애리시 선교사’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임 박사님이 이덕주 교수의 소개로 원고를 들고 왔다. 고향이 논산인 그는 사애리시 선교사에게 전도된 할머니가 자신의 서울 자취방 시절에 밥상머리에서 된장찌개와 함께 꼭 등장하는 인물이 사부인(사애리시) 이야기였다고 했다. 사부인이 아니면 구원 못 받았다는 할머니의 그 오래 묵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 위해서 그는 미국 드루대학교 아카이브를 찾았고 고귀한 자료들을 찾아내었다. 그의 신문기자적 발상과 발품으로 사애리시는 다시 부각되었다. 그가 쓴 『이야기 사애리시』는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뽑혔고, 그가 유관순을 거두어 공주 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 보내 공부시키고, 돌봐주었을 뿐만 아니라 충청권에 여러 학교와 교회를 세워 감리교선교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 책을 발판으로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훈장도 수여 받았다. 사부인은 결혼 3년 만에 남편(로버트 샤프 선교사)이 순직하고 홀몸으로 평생을 한국교회와 교인들, 한국 민중들을 섬기다 갔다(사애리시 관련 유품과 훈장은 천안 하늘중앙교회에 잘 보존되어 있다.). 사애리시 선교사를 통해서 나는 또 한 번 나의 청년 시절의 고정관념, 선교사는 스파이, 선교사는 제국주의 앞잡이라는 생각을 조용히 거둘 수 있었다.

 

4.

이런 생각이 지배적인 시점에서(2022년 5월경) 평소 존경하는 선배인 윤경로 박사, 이덕주 교수가 급히 만남을 청했다. 이유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내한선교사사전』을 준비 중이고, 연구소 창설 40주년 기념으로 사전을 발간하려는데 그 제작을 신앙과지성사에서 맡아 달라는 것이다. 3,500명의 선교사가 소개될 것이고 큰 책으로 1,600쪽이 넘을 것이라고 하였다. 거절할 수가 없는 선배님들의 부탁을 승낙하고 우리 신앙과지성사는 5월부터 비상이 걸렸다. 80여 명의 필자가 자비량으로 쓴 사전원고가 20여 차례에 걸쳐 들어왔다. 이그! 선교사들을 스파이 운운했던 죄(?)를 톡톡히 걸머쥐었다. 원고량은 200자 원고지 3만 매가 넘었고 이것을 두께 6Cm가 넘지 않도록 편집하고 제작해야 했다. 양장제본의 최대 두께가 6Cm이므로, 용지 선택과 인쇄, 제본에 심혈을 기울였다. 드디어 12월 중순, 멋진 책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내한선교사사전』이다. 근래 보기드문 대작이다. 이 사전의 제안자이시고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하신 이만열 박사님(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감격하셔서(12월 22일 선교사들의 묘지 양화진에서 출판기념 예배를 드렸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셨다. 12월 22일, 겨울 날씨였지만 유독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몸이 날아갈 정도였다. 많은 귀빈과 내방객은 예배를 마치고 이 두툼한 책을 가슴에 안고, 빠른 발걸음으로 헤어졌다. 이 책에 한국에 온 3,500명 가까운 외국인 선교사들의 삶이 담겨 있다. 너무 귀중한 삶의 기록들이 하나로 묶여 졌다. 한국교회 새로운 기념비가 세워졌다. 하나님은 이 작은 출판사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게 하셨다. 3천5백 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기도했던 세계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의 발간을 토대로 내한선교사들에 대한 격조 있는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최병천 장로 (신앙과지성사 대표)

성탄절에 더욱 그리운 박순경 목사님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

성탄절에 더욱 그리운

박순경 목사님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

박순경 지음, 신앙과지성사, 2014년

1.
벌써 2022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삶이 힘겹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희망을 떠올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건의 흐름을 통틀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튼 시간은 참 묘하고, 빠르고, 느리고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속절없이 또 한 해를 보내는 지금 12월에, 아쉽게도 귀한 삶을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어른들이 생각난다. 그중에 한 분, 박순경 선생님이 줄기차게 생각난다. 어른다운 어른이 사뭇 그리운 까닭은 세상 돌아가는 것이 꼭 동화 같은 시간의 연속임에도 이젠 좀 제대로 살라고 호통쳐 주실 어른이 꼭 필요한 ‘시간’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백 세를 살아보니 뭐 이러고저러고 간지러운 얘기하는 어른이 아니라, 백 세가 되었어도 대쪽 같은 선비정신을 잃지 않으시고 흐트러짐 없이 고고하게 사셨던 어른이 정말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기독청년운동을 통해 이나마 세상 결, 역사 결을 짐작하게 된 ‘시간’을 소유한 나에게 박순경 선생님은 멀리서 뵈어도 다가갈 수 없었던 어려운 선생님이셨다. 감청 대회를 통해 몇 번 강연을 들었고 가끔 마주할 때마다 차렷 자세로 인사만 드리기도 어려운 선생님이신데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2014년 초로 기억난다. 역시 차렷 자세로 “선생님이 웬일로 저에게 …” 뭐 그렇게 어려운 대화의 물꼬를 텄던 기억이 난다. “최 장로, 내가 마지막으로 세 권의 책을 내려고 해, 그 첫 권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인데 원고지로 3천 매가 넘는 것인데, 이걸 최 장로가 책으로 내줘야겠어!”

2.
거절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고민도 깊어졌다. 그 어려운 책을 소화시키기도 어렵고, 한 열 달이 지나도록 긴장하고, 또 살펴야 하는 어려운 책이다. 그 제작과정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항상 지시하시는 것에 따라 교정지를 싸 들고 사당동 근처의 피자집으로 갔을 때다. 만원 지하철 퇴근길에 시달리며 땀 흘리며 늦지 않으려고 뛰어갔던 2014년 여름날로 기억된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큼직한 피자를 몇 쪽 먹으려고 군침을 흘리는데, 선생님께서 만류하시는 것이 아닌가! “최 장로, 피자는 건강에 그리 좋지 않아요. 그러니 한쪽만 먹으라우! 그리고 콜라는 나빠 냉수에다 천천히 씹어 먹으라우!” 아쉬워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피자 한 쪽 먹고 선생님의 김 애기를 들었다. 그 이후에는 몇 차례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교정지를 드리곤 했는데 책이 거의 완성되는 꼴이 갖춰지는 때라서 기분이 좋으신지 통 큰 명령을 내리셨다. “최 장로 맥주 한 잔 주라우! 중국요리를 느끼하게 어떻게 그냥 먹겠니?”
이 책이 나오고 산타에게 선물 받은 아이처럼 좋아하셨던 박 선생님은 목표하신 2권, 3권을 더 내시지 못했다. 겨울 눈길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러 가시다가 그만 낙상하셔서 큰 고생을 하셨다. 이토록 어렵게 보이는 책이 2014년 11월에 간행되고 아마 그달에 가르치셨던 이화여대에서 성대하게 출판기념회를 치른 후였다. 보조기를 끌고 다니시며 댁내에서만 움직이시는 선생님을 송병구 목사와 함께 두어 차례 뵈었다. 그때마다 “최 장로, 나 2권 거의 집필 완료 단계이고, 3권은 내가 김애영이랑 같이 쓸 거야. 그 책까지 최 장로가 다 내줘야 해!” 그렇게 호기 있게 말씀하셨는데 세상에 나온 책은 결국 이 책 하나다. 2권은 선생님 댁 서랍에 고이 놓여 있고, 3권은 딸같은 김애영 교수 의중에 달렸다.

3.
이 책이 나오고 감회 어린 식탁에서 말씀하신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다. 살아오신 이야기를 몇 차례 때론 차분하게, 때론 분노 속에서 토로하셨지만 소개하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다. 6.25 전쟁이 막 터지기 전에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다니실 때 선생님을 흠모(?)했던 학생이 있었단다. 급히 동숭동 교정에서 만났단다. “나, 학도병으로 가게 됐어. 우리 꼭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 그게 마지막 말이었어. 그 후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야.” 짧은 이야기를 길게 하시며 우울해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선생님 혹시 6.25가 안 일어났으면 그분과 나중에 결혼하실 …” 조용히  웃으시고 말으셨지만 선생님에게는 참 비정한 역사의 시간이었겠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통일신학에 매진하셨나?
이 책은 박순경 선생님과 나의 사귐의 ‘시간’을 제공해 준 책이다. 책이 나오고 간간이 전화를 주셨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직전인 2019년 겨울, 마지막 긴 통화가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제2권의 출간을 꼭 해야 하는데 기력이 없다고 하시면서 본인이 70이 넘은 나이에 구속되었던 동경에서의 강연을 언급하시면서 긴 시간을 서운해하시기도 하고 분노하시기도 하면서 말씀하신 것이 가끔 생각나면서 나부터 죄송하기 그지없다. “야, 최 장로! 그래, 이 연약한 여자 하나 잡혀가게 하고 된거 뭐 있나! 종로 5가? 에큐메니컬 운동? 야, 다 집어치우라고 하라우! 남정네들이 되어가지고 에라이….”
우리 민족의 만악의 뿌리는 ‘분단’이다. 그런데 이 분단의 문제를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아 ‘통일신학’을 표방하고 연구하신 박 선생님의 공적은 큰 산과 같다. 나는 작은 일이지만 이리저리 애를 써서 감신대 도서관 입구에 박 선생님의 사진을 동판에 담아 액자처럼 걸어두게 하였다.(박 선생님이 보고 싶을 땐 가끔 가서 보시라!) 그리고 감신대의 평화통일연구소(소장 최태관 박사)에서 첫 작업으로 박순경 교수님을 조명하는 세미나를 열었을 때 이 책을 100권 기증하여 나누었다.
끝으로 참 어렵고도 무거운 이 책의 이해를 위해 박 선생님의 글을 요약정리하는 것으로 책 소개를 마치려 한다. 2022년이 저무는 시간 12월의 새벽에 박순경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이 글을 쓴다. 제2권, 제3권 계속 출간되어 북녘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관계자와 동포들에게 꼭 전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는데…
성탄절이 다가오는 지금, 박 선생님이 더욱 그립다.

4.
우리가 미래를 설계하지만 미래시간 자체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한 시·공의 유한성과 한정성 없이는 미래에로 변혁하고 진보할 수 없다.
우선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이라는 우리의 어려운 주제 설명이 필요하다. 제Ⅰ권 은 구약성서에 기초한 창조자·구원자, 하나님 아버지에 해당하며, 제Ⅱ권은 신약성서에 기초한 창조와 구원의 중보·화해자 예수 그리스도, 아들 하나님과 시간·역사를 논할 것이다. 제Ⅲ권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통일성을 이루는, 창조와 역사의 구원자 성령 어머니 하나님과 교회·민족·세계의 구원 문제를 논할 것인데, 제Ⅲ권은 나의 제자 한신대 김애영 교수의 몫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제Ⅱ권까지 완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90세를 넘긴 내 나이에 너무도 벅차다. 그러나 감행할 생각이다.
삼위일체론 자체는 제Ⅱ권의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공 간과 직결되어 있으나, 편의상 시간·역사 개념으로서 공간을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래도 역사는 보다 더 시간 질서가 우선하므로 시간 개념이 더 부각된 것이다. 요점은 도대체 시·공간이 무엇인가? 우리는 시·공을 창조자·구원자 하나님과 피조물 세계와 역사와의 관계질서들(Relationsordnungen) 혹은 신학 전통에서 논의되는 창조질서(Schopfungsordnung)에 해당하는, 그의 의로운 법질서의 근원적 차원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시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제 내적 영원한 관계질서의 차원이며, 그에게서부터 피조물 우주와 역사에 주어지고, 시·공 안에서 피조물과 역사가 생동하고 변화하고 변혁하면서 그의 미래시간에로 진보하게 하는 은혜로운 차원이다. 하나님의 자체 내적 시·공의 관계질서는 영원하나, 피조물과 역사에 주어지는 시공은 한정적이고 유한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한 시·공의 유한성과 한정성 없이는 미래로 변혁하고 진보할 수 있는 계기는 발생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역사적 삶과 존재란 없다.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어둠에서 빛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필리핀 감리교회의 시작과 전개>, 디오니시오 D.알레한드로 지음, 이원식 이상훈 옮김, 신앙과지성사

1.
한국에서 보다도 필리핀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진 사나이 이원식 선교사다. 신학교를 마치고 잠시 다녀오려던 필리핀 여행길이었는데 내 생각엔 아주 필리핀에서 삶을 끝장낼 것 같은바, 이젠 완전히 필리피노가 되었다. 이원식이 나를 친형처럼 대해 주니 그가 하는 선교의 족적을 존중하며 하라면 하라는 대로 쫓아다닌 것이 한 20여 차례 이상을 방문한 것 같다. 여기에 등장할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서울남연회 총무를 지낸 이상훈 목사다. 이상훈은 이원식의 그림자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20여 차례 이상 필리핀 여행을 함께 하면서 마닐라의 한국식당을 하루 전세 내서 마닐라 시내에서 방황하는 한국인 노숙자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이고 생필품을 한 자루씩 선물하는 일을 몇 차례 했었다. 그 모임에 초대된 마닐라의 노숙자들은 형편상 귀국을 할 수 없어서 주로 카지노가 있는 호텔 주변을 맴돌면서 얻어먹기도 하고 쪽잠도 자는 사람들인데, 아무런 조건 달지 않고 와서 밥이나 실컷 먹고 가라고 하니 약 200명 정도의 손님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 행사 중에 이원식 선교사가 말했다. 필리핀 감리교 본부에 갔다가 땡처리하는 책 중에 <From Darkness to Light>란 책이 한 2~30부 있길래 사 왔는데 필리핀 감리교회의 역사를 쉽게 잘 정리했다는 것이다. 책 이야기만 나오면 진지해지는 두 사람에게 나는 말했다. 그럼 두 분이 영어 실력과 따갈로그 실력이 어지간하고, 이상훈 목사도 필리핀에서 10년 이상 살았던 경험이 있으니 정성들여 번역을 하시라고!

2.
그 후 한 1년쯤 지냈을까 두 사람이 연희동 신앙과지성사로 찾아왔다. 매운탕을 훌훌 들이켜 먹으며 하는 말씀이 내가 번역을 하라고 해서 번역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이다. 바쁜데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화답하면서도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친한 사이에 빠꾸 놀 수도 없고, 또 요즘같이 책도 지겹게도 팔리지 않는 데 이를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밀려왔다. 결과적으로는 필리핀에서 오래 따갈로그를 하며 국어 실력이 약화 된 이원식 선교사의 원고는 신앙과지성사가 꼼꼼히 다듬고, 판매 부분은 이상훈 총무가 남연회 8년 임기 마친 기념으로 제작비를 후원하기로 하여 잠시 걱정거리는 은혜스럽게 해소되었다.

3.
두 이 씨가 뚝딱뚝딱 해 놓은 책에 광을 내기 위하여 만만한 이덕주 박사님께 추천사를 부탁하였다. 그러고 보니 추천사 포함 세 이씨의 작품으로 이 책이 탄생하였다. 우리의 관계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계신 이덕주 교수님은 이 책의 성격과 두 필자가 왜 이 책을 번역하려했는지 예리하게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한국감리교회가 필리핀에 파송한 1세대 선교사 이원식 목사가 자신의 ‘필리핀 선교 35년’을 정리하면서 선교현장에서 함께 했던 친구 이상훈 목사와 함께 알레한드로 감독의 교회사 책을 번역하였다. 보통 선교사들이 선교사역을 정리할 때 자신의 사역이나 업적을 소개하고, 홍보하는 성격의 책을 내는 데 이원식 목사는 필리핀 기독교회사의 고전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중략)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자신을 포함하여 한국교회 1세대 선교사들의 사역 가운데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어두운’ 면도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과거에 경험했던 독단적이고 일반적이었던 ‘식민주의 선교’의 어두운 방식을 버리고 현지 교회와 손잡고 협력하는 ‘동반자 선교’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4.
이원식·이상훈 역자의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 책은 1898년부터 1970년까지 필리핀 연합감리교회의 각종 사건과 회의 보고, 감독 소견 등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책의 구성이 단순한 것은 가급적 많은 사실을 세세하게 기록하려 했던 저자의 의도이다. 1905년 카츠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놓였던 역사적 운명 때문에 한국과 필리핀 개신교 역사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운명의 선교 역사였지만, 서로 다른 종교적,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성장해 왔다. 한국의 해외 선교의 역사에서 필리핀 선교는 못자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아무쪼록 이 책이 한국과 필리핀의 선교 역사 그리고 전망 등을 연구하는데 작은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5.
힘든 교열 작업을 하면서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어도 그렇지 내가 맏형이니까 형네 출판사로 넘어갔으니 원고는 알아서 하시라는 두 역자의 배짱 때문에 땀을 좀 흘리며 마감하고 제작에 착수하려는데, 마침 내방 탁자에 놓인 이 책의 마지막 교정지를 들춰보며 임연철 박사께서 뭐냐고 물으셨다. 사정을 다 듣고 난 임 박사는 그렇다면 자신이 미국 드루대학교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필리핀 관련 사진들이 많으니 그것들을 이 책 사이사이에 넣으라는 것이 아닌가! 임연철 박사는 동아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국립극장장을 지낸 언론계의 베테랑 기자 출신인데 고향인 충청도 논산에서 사애리시 선교사에게 전도 당한 할머니의 생전의 말씀을 따라 사애리시를 연구하다가 전기 작자로 거듭난 분이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우리 감리교 선교사들의 전기를 계속 출간하고 있는데 우연히도 가세하셔서 이 책이 사진과 함께 빛나는 책이 되게 기여해 주었다. 저 세상에 이미 가 계신 저자 알레한드로가 자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필리핀 감리교회로 뛰쳐나올 일이 벌어졌다. 책이 가치 있게 편집되었고, 아무튼 이 책은 필리핀 감리교회에 대한 귀한 선물이 되었다. 우리 세 사람의 우정의 산물로 태어난 결과물이란 점에서 발행인으로 특별한 애정이 가는 책이 되었다.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한국 교회 이야기

한국 교회 이야기

이덕주 지음, 신앙과지성사, 2009

1.
내겐 참 고마운 책이고 신앙과지성사에게는 불쏘시개 같은 책이다. 초판의 판권이 2009년으로 발행연도가 표기되었으니 그때쯤 나는 매우 지치고 피곤해 있었다. 외주 출판물에 의존해서 간신히 버텨오던 출판 사역을 더 이상 감당하기가 쉽지 않고 지루했다. 1987년에 주변 문서선교운동에 초석이 된다는 자부심으로 출발하여 당시로서도 20년이 훌쩍 넘었으나 그 시점에서 출판 사역을 접을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몇 개월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감신으로 이덕주 교수님을 찾아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만 해도 이 교수님은 전성기였다. 숱한 책을 출판하고 여기저기 강연에 분주하여 이 교수님의 연구실이 있던 감신 뒤편의 오래된 빨간 벽돌의 옛 건물 ‘관회수교’ 3층 구석방은 늦은 저녁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힘이 없니?”
“형, 할 말이 있어왔어. 아무래도 출판을 그만두어야 할까 봐!”
불쑥 던진 내 말에 이 교수님은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구석 어딘가에서 원고 뭉치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복사 용지들을 한데 모아 제본한 허술한 책 뭉치였다. 손때가 듬뿍 묻은 듯한 책 뭉치 앞에는 흐린 큰 글씨로 “한국 감리교회 역사”라고 쓰여 있었다. “병천아, 이 원고를 잘 궁리해서 좋은 책을 한번 해봐, 내가 강의 자료로 삼은 것인데 꽤 소중한 자료니까 잘 될 거야.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여기서 그친다면 말이 되니?”

2.
이덕주 교수님의 격려의 선물로 받은 원고를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고 토론했다, 당시 연세대 언더우드기념관에서 조교를 했던 홍승표 박사는 이 원고에 어울리는 귀한 사진들을 찾아주었다. 그리고 딱딱한 교회사가 아닌 친근감 있게 다가가는 책 제목을 요구했다. 그리고 원고와 사진이 함께 잘 조화를 이루도록 편집과 제작에 신경을 썼다. 하여 본사의 기둥인 ‘쉽게 쓴’ 시리즈의 첫권이 된 셈이다.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 된 참 고마운 책이다. 감리교회에 관련된 원고가 많았지만, 제목을 한국교회 이야기로 보편화했다. 범위를 한국교회 전체로 넓히면서 누구나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에피소드 60개로 참신하게 엮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사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는 교회사 책이 탄생된 저녁, 큰일이 벌어졌다. 이 책 2,000부 초판을 받아놓고 책더미 위에 베니어합판을 올려놓고 퇴근했으니 망정이지, 사무실 위층에 수도가 터져서 아침에 출근해보니 위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어떻게 만든 책인데 자칫하면 다 젖어 없어질 뻔했던 기억이 새롭다. 초장부터 큰 액땜을 하더니 이 책은 지금까지 만부가 넘게 나갔고 이제 아홉 번째 판을 다시 찍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필두로 ‘신앙과지성사’가 출판의 맥을 잡은 것이고 쉽게 쓴 시리즈로 여러 좋은 책이 뒤를 이었고 출판의 격을 높여 주었다. 어려운 형편에 용기를 준 효자 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3.
표지 앞면에 이런 글귀가 있는데 이 책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교회사를 민족사와 연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이 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공동체가 풀어야 할 과제를 주시고, 그것을 풀어가면서 신앙의 상징과 성숙을 이루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는 교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때를 분간할 수 있는 지혜다. 그런 지혜가 있어야 민족공동체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교회가 ‘민족구원’이라는 선교의 궁극적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 ‘복음과 교회 그리고 민족의 역사’라는 다소 거창한 머리글만 읽어도 이 책의 가치를 알게 된다. 지금까지 나온 교회사 책 중에서 가장 출중한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책이다.

죽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에도

죽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에도
추용남 지음, 신앙과지성사, 2022

1.
이정배 교수가 전화를 했다. 암 투병 중인 후배인데 힘겨운 처지에서 비탄조의 글이 아니라 패기 있고 성찰적인 글들로 원고가 좋으니 출판하라는 것이었다. 이 박사의 안목에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만 문제는 빠른 제작에 착수할 수 없는 여건이다. 개 교회사와 몇 개의 단행본, 그리고 장장 1500쪽이 넘는 내한선교사 사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지성사 내부 사정이 밀려있는 원고들 때문에 새 원고를 빨리 책으로 만들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추용남 목사에게 전화를 했다. 바쁜 일정을 설명하고 책 출판을 좀 미루자고 했더니 “장로님 말씀은 잘 듣고 이해합니다만, 제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급행으로 책을 내는 수밖에. 이렇게 3주 만에 나오게 된 이 책은 책 제목부터 참 비장하다. 우리들에게 『죽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책의 제목은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3주의 시간 동안 나의 뇌리를 오래도록 지배했다. 출판계획도 없었는데 불쑥 튀어나온 책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삶과 죽음은 이코르라고 하는 정답을 심오하게 성찰하게 하는 책이다.

2.
이 책에는 한평생을 목회자로 온전하게 헌신하며 살았지만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암과 투병하면서도 진솔한 신앙의 시간을 엮어가는 추용남 목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특별히 목회자란 누구이며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이고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주고 있다.
지은이는 독일과 미국에서, 한국의 시골 마을에서도 목회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목회자의 소신과 진실한 신앙 양심으로 목회했고 어느 곳에도 어긋나면 타협하지 않고 돌아서 꿋꿋한 길을 양보 없이 걸어왔다. 위암 4기의 고통 속에서도 죽음과 생명이 하나 되는 영생을 몸으로 보여주는 한 목회자의 투병 과정을 기록으로 남김으로 영혼의 어두운 밤을 밝혀줄 작은 촛불을 켜들고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게 하는 책을 펴냈다. 그의 암 투병기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설교와 좋은 글들을 함께 수록함으로 삶과 사랑과 죽음을 더욱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살아 숨 쉬는 신앙 이야기가 우리 곁을 찾아왔다.

3.
2022년 7월 25일이다. 이 책의 출판기념회가 내가 속한 공덕교회에서 열렸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추용남 목사의 삶에 뜨거운 격려를 하는 시간이었다. 소신 목회를 하시다 은퇴하신 김고광 목사님, 허원배 목사님, 이정배 박사님, 이은선 교수님 등등 좋은 말씀들이 건강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꿋꿋한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추용남 목사를 격려했다. 나도 책 소개를 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추 목사님 힘내세요!, 위암 4기 그 어려운 상태에서도 이런 책을 당당하게 쓴 목사님 같은 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책을 내신 목사님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이제부터 새 삶을 산다고 생각하시고 뚜벅뚜벅 나가세요!”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비가 세차게 내린다. 세차게 비는 내리는데, 속초 앞바다를 외롭고 쓸쓸하게 걷고 있을 추 목사님이 오랜 시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인간 추용남의 건투를 빌면서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서 정겹게 파도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부부) 사진으로 꾸며진 이 책의 표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게 된다. 숱한 고생을 하면서 목회한 몸인데 오래도록 죽음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