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뉴스] 이현주 교수의 영어로 신학 맛보기! 이현주 지음/신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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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사진)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은 지난 15년간 세계 교회사를 강의하면서 ‘평신도를 위한 세계 기독교의 역사 이야기’를 다시 수정하고 보완해 새로운 책으로 펴낼 생각에 골몰했다. 12대 총장을 맡고 제2 창학에 나서다 보니 책을 쓸 여유가 많지 않았지만 틈틈이 원고를 쓰기 시작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처음 이 책을 쓰게 한 이는 2007년 작고한 친형인 고 김동완 전 NCC(KNCC) 총무다. 저자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김 전 총무는 동생에게 세계교회 이야기를 좀 쉽게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래서 평신도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썼다. 그 책이 벌써 10판 이상이나 재발행됐다.
“여러 스승들로부터 배운 통찰력을 가지고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독창적인 해석은 없고 스
승들의 해석을 모아 정리했죠. 감신대 박대인 교수, 연대신학대학원 한태동 교수와 민경배 교수,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수많은 교수들의 가르침이 밑바탕이 됐습니다.”
기자들과 점심시간에 만난 김 총장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신학적 사관을 설명했다. “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됨)와 거듭남과 구원의 내적 확신을 강조하면서도 믿음으로 끝나지 않고 경건의 수련과 사랑의 수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성화를 포함하는 복음주의이면서도, 그것이 개인 구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 참여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고 나눔과 분배를 통해 세상의 빛이 돼가는 사회적 성화의 차원까지 열리는 복음주의를 의미합니다.”
“감리교 감독회장 자리를 놓고 밀고 당기는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세계 교회사를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람직한 교회상, 바람직한 영성상을 그리면서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꿈꾸어 보는 작업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지성과 영성을 두루 갖춘 분이 지도자로 섰으면 좋겠습니다.”
윤중식 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1087736
한국 개신교의 회복, 교회다움의 길 한국개신교의 역사는 고난과 승리, 부흥과 타락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초창기에는 모험적인 구도자들이 해외에 나가 복음을 접하고 우리 땅에 전하기까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생명을 내건 목숨의 일전이었다. 그 뒤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자유와 해방의 물결을 이뤄내는 일들은 가히 한국개신교 역사의 승리라 할 수 있다. 한편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에서부터 1909년의 백만명구령운동은 복음의 폭발적인 역사를 이뤄낸 시기였다. 북으로는 선천과 의주, 남으로는 재령과 서울을 비롯하여 광주와 대구까지 그 물결이 흘러갔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는 타락의 역사는 심각한 병폐를 낳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현재까지 겪고 있는 교권의 금권선거는 그 시절에 낳은 부끄러운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이덕주 교수가 쉽게 풀어 쓴 <한국 교회 이야기>는 선교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통사 성격의 한국 교회사이다. 초창기 복음전래에서부터 정치와 종교의 결탁에 이르는 현대 시기까지 한국교회의 공동체가 각 시대마다 시대정신으로 응답해 온 과정과 그 결과들을 보여주는 이야기 교회사로, 역사적인 사건과 그에 따른 인물 중심의 교회사이다. 한국개신교의 최초 복음전파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주도되지 않았다. 우리의 모험적인 구도자들이 만주와 일본 등으로 먼저 나가서 복음을 접한 뒤, 세례를 받은 후 우리말 성경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받게 한 일은 한참이나 뒤의 일이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개신교 복음전파는 능동적인 수용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 들어 온 개척선교사들의 섬김과 희생, 봉사와 겸손은 복음을 점진적으로 확산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의료선교는 고종 황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지도자 계층에게 활발한 복음전파의 수단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억눌리고 소외된 민중 계층과 빈곤 계층, 그리고 여성 계층에게도 복음전파는 신분차별과 문맹퇴치 차원에서 중요한 복음전파의 통로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활발하던 시기가 일제의 침략과 지배의 시기로 얼룩지고 있었으니, 우리로서는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개신교인들은 불행한 현실을 탓하기보다는 자유와 해방의 붐을 조성하였다. 무력으로 지배하는 일제의 지배에 맞서 구국기도회를 비롯하여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각종 저항운동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한편 1907년의 평양대부흥은 한국개신교 역사 속에서 잊지 못할 대부흥의 해였다. 그 때를 기점으로 1909년의 백만명구령운동은 그야말로 복음의 대 물결을 이룬 시기였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의 살인과 간음과 절도뿐만 아니라, 축첩(蓄妾)과 노비(奴婢)제도 같은 비도적인 일들도 과감히 척결해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개신교 내의 부끄러운 역사도 없지 않았다. 일제 말 반민족적 ‘친일’ 행적에 대한 교계 지도자들의 진정한 사죄도 없었을 뿐더러, 그에 대한 용서를 바탕으로 하는 화해와 일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개신교 내의 신학적인 갈등과 교권의 정치화 문제와 금권선거 문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심각한 폐단으로 남아 있다. “각종 교계 행사에 자유당 인사들이 초청받았고 ‘돈을 싸들고’ 지방 교회 목사들을 찾아다니는 목사들도 적지 않았다. ‘3·15 부정선거’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기독교계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교회는 어느새 학생들의 ‘규탄’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289쪽)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일어났던 회개운동처럼 사회적인 비도덕적인 악행들을 스스로 정화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다. 아울러 교계 내 선거정치와 직분제도를 개혁하거나 타파하지 않는 이상 진정한 교회다움의 길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이 땅에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구한말에서부터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기까지, 그리고 현재의 남북분단은 물론이요 개신교 내의 교권의 정치화와 분란에 이르기까지, 한국개신교의 역사 속에 나타났던 시대정신들을 통해 한국개신교가 진정한 교회다움의 길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헤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성권 (littlech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