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필리핀 감리교회의 시작과 전개>, 디오니시오 D.알레한드로 지음, 이원식 이상훈 옮김, 신앙과지성사

1.
한국에서 보다도 필리핀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진 사나이 이원식 선교사다. 신학교를 마치고 잠시 다녀오려던 필리핀 여행길이었는데 내 생각엔 아주 필리핀에서 삶을 끝장낼 것 같은바, 이젠 완전히 필리피노가 되었다. 이원식이 나를 친형처럼 대해 주니 그가 하는 선교의 족적을 존중하며 하라면 하라는 대로 쫓아다닌 것이 한 20여 차례 이상을 방문한 것 같다. 여기에 등장할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서울남연회 총무를 지낸 이상훈 목사다. 이상훈은 이원식의 그림자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20여 차례 이상 필리핀 여행을 함께 하면서 마닐라의 한국식당을 하루 전세 내서 마닐라 시내에서 방황하는 한국인 노숙자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이고 생필품을 한 자루씩 선물하는 일을 몇 차례 했었다. 그 모임에 초대된 마닐라의 노숙자들은 형편상 귀국을 할 수 없어서 주로 카지노가 있는 호텔 주변을 맴돌면서 얻어먹기도 하고 쪽잠도 자는 사람들인데, 아무런 조건 달지 않고 와서 밥이나 실컷 먹고 가라고 하니 약 200명 정도의 손님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 행사 중에 이원식 선교사가 말했다. 필리핀 감리교 본부에 갔다가 땡처리하는 책 중에 <From Darkness to Light>란 책이 한 2~30부 있길래 사 왔는데 필리핀 감리교회의 역사를 쉽게 잘 정리했다는 것이다. 책 이야기만 나오면 진지해지는 두 사람에게 나는 말했다. 그럼 두 분이 영어 실력과 따갈로그 실력이 어지간하고, 이상훈 목사도 필리핀에서 10년 이상 살았던 경험이 있으니 정성들여 번역을 하시라고!

2.
그 후 한 1년쯤 지냈을까 두 사람이 연희동 신앙과지성사로 찾아왔다. 매운탕을 훌훌 들이켜 먹으며 하는 말씀이 내가 번역을 하라고 해서 번역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이다. 바쁜데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화답하면서도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친한 사이에 빠꾸 놀 수도 없고, 또 요즘같이 책도 지겹게도 팔리지 않는 데 이를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밀려왔다. 결과적으로는 필리핀에서 오래 따갈로그를 하며 국어 실력이 약화 된 이원식 선교사의 원고는 신앙과지성사가 꼼꼼히 다듬고, 판매 부분은 이상훈 총무가 남연회 8년 임기 마친 기념으로 제작비를 후원하기로 하여 잠시 걱정거리는 은혜스럽게 해소되었다.

3.
두 이 씨가 뚝딱뚝딱 해 놓은 책에 광을 내기 위하여 만만한 이덕주 박사님께 추천사를 부탁하였다. 그러고 보니 추천사 포함 세 이씨의 작품으로 이 책이 탄생하였다. 우리의 관계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계신 이덕주 교수님은 이 책의 성격과 두 필자가 왜 이 책을 번역하려했는지 예리하게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한국감리교회가 필리핀에 파송한 1세대 선교사 이원식 목사가 자신의 ‘필리핀 선교 35년’을 정리하면서 선교현장에서 함께 했던 친구 이상훈 목사와 함께 알레한드로 감독의 교회사 책을 번역하였다. 보통 선교사들이 선교사역을 정리할 때 자신의 사역이나 업적을 소개하고, 홍보하는 성격의 책을 내는 데 이원식 목사는 필리핀 기독교회사의 고전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중략)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자신을 포함하여 한국교회 1세대 선교사들의 사역 가운데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어두운’ 면도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과거에 경험했던 독단적이고 일반적이었던 ‘식민주의 선교’의 어두운 방식을 버리고 현지 교회와 손잡고 협력하는 ‘동반자 선교’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4.
이원식·이상훈 역자의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 책은 1898년부터 1970년까지 필리핀 연합감리교회의 각종 사건과 회의 보고, 감독 소견 등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책의 구성이 단순한 것은 가급적 많은 사실을 세세하게 기록하려 했던 저자의 의도이다. 1905년 카츠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놓였던 역사적 운명 때문에 한국과 필리핀 개신교 역사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운명의 선교 역사였지만, 서로 다른 종교적,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성장해 왔다. 한국의 해외 선교의 역사에서 필리핀 선교는 못자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아무쪼록 이 책이 한국과 필리핀의 선교 역사 그리고 전망 등을 연구하는데 작은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5.
힘든 교열 작업을 하면서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어도 그렇지 내가 맏형이니까 형네 출판사로 넘어갔으니 원고는 알아서 하시라는 두 역자의 배짱 때문에 땀을 좀 흘리며 마감하고 제작에 착수하려는데, 마침 내방 탁자에 놓인 이 책의 마지막 교정지를 들춰보며 임연철 박사께서 뭐냐고 물으셨다. 사정을 다 듣고 난 임 박사는 그렇다면 자신이 미국 드루대학교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필리핀 관련 사진들이 많으니 그것들을 이 책 사이사이에 넣으라는 것이 아닌가! 임연철 박사는 동아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국립극장장을 지낸 언론계의 베테랑 기자 출신인데 고향인 충청도 논산에서 사애리시 선교사에게 전도 당한 할머니의 생전의 말씀을 따라 사애리시를 연구하다가 전기 작자로 거듭난 분이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우리 감리교 선교사들의 전기를 계속 출간하고 있는데 우연히도 가세하셔서 이 책이 사진과 함께 빛나는 책이 되게 기여해 주었다. 저 세상에 이미 가 계신 저자 알레한드로가 자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필리핀 감리교회로 뛰쳐나올 일이 벌어졌다. 책이 가치 있게 편집되었고, 아무튼 이 책은 필리핀 감리교회에 대한 귀한 선물이 되었다. 우리 세 사람의 우정의 산물로 태어난 결과물이란 점에서 발행인으로 특별한 애정이 가는 책이 되었다.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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