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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대부흥과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로버트 하디

2022년 3월 17일/0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한국교회 대부흥과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로버트 하디

 

김칠성 목원대학교 교수

 

한국 개신교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성장과 발전의 밑바탕에는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다. 이렇게 한국 개신교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수많은 선교사들 중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1865-1949, 河鯉泳, 하리영) 선교사이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원산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한국 대부흥의 주역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디 선교사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1886년에 시작된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의 영향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과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1890년 조선에 입국하여 8년간 독립선교사(교단 파송을 받지 않은 선교사를 지칭)로 활동했다. 그 후 1898년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대부흥, 신학교육, 농촌계몽, 문서선교 등 다방면에서 한국 개신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은퇴한 이덕주 교수는 최근 하디 선교사의 전기를 서술한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를 펴냈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의 1장에는 하디의 출생과 선교사가 되기까지의 과정(1865-90), 2장에는 독립선교사로 활동했던 8년의 시간(1890-98), 3장에는 한국 부흥을 위해 기여한 내용(1898-1907)이 담겨 있다. 이어서 4장에서는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서 교수와 교장으로 활동했던 내용(1907-23), 5장에서는 문서선교, 농촌계몽운동, 남북감리교회 연합운동 및 그의 은퇴와 별세를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6장에서는 하디의 저술(논문과 단행본)과 그의 신학사상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선교사 하디가 다방면에서 한국 개신교 발전을 위해 기여한 내용을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다음의 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하디가 처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한국교회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인 저자의 풍부한 한국사 지식은 하디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과 일제강점기에 하디가 내린 결정을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그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연구는 매우 유용하다.

둘째, 이 책은 다양한 자료의 활용이 돋보인다.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로 시작하여 이후 미국 남감리교 소속으로 한국에서 무려 45년간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가 직접 쓴 글이나 그에 관한 내용이 캐나다, 미국, 한국 등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저자는 해외에 있는 자료뿐만 아니라 오래된 국내 자료도 발굴하여 하디의 생애와 활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특히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국내외 자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였기에, 후대 연구자들이 앞으로 하디를 연구할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예상된다.

셋째, 이 책에서 사용한 도표들은 독자들이 하디의 활동을 더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 책은 하디 선교사의 생애와 다양한 활동을 세세히 다루었기에, 그 서술 분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저자는 곳곳에서 도표를 통해 앞서 소개한 내용을 요약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부록에 실린 ‘하디 연표’는 하디와 그의 가족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연대기적 상황을 병기함으로써 하디의 생애와 활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첫째, 몇 가지 표현상의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1) 저자는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서 출생한 펜윅”(77쪽)이라고 그를 소개하며, 그 이후 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40쪽에서 펜윅을 하디, 에비슨과 같은 “감리교 신도들”로 표기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하디, 펜윅, 에비슨은 모두 캐나다 출신이고, 하디와 에비슨은 감리교 출신이지만(에비슨은 후에 장로교로 소속을 변경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됨), 펜윅이 감리교인인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2) 58-59쪽에서는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VM)의 영향의 일환으로 하디에게 선교적 자극을 준 인물인 존 포어맨(John N. Foreman)을 “목사”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디의 1914년 혹은 1934년의 글을 기반으로 작성된 내용이다. 하지만 존 포어맨은 당시 목사가 아니었고,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신학교에 갓 입학한 하디 또래의 젊은 신학생이었다. 아울러 67쪽에서 “목사”로 소개한 로버트 와일더(Robert Wilder, 1863-1938) 또한 당시에는 하디보다 두 살 많은 20대의 젊은 대학생이었다. 다시 말해 포어맨과 와일더 둘 다 후에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하디가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 이 두 사람을 목사로 지칭했지만, 하디가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던 1886년에 캐나다에 와서 해외선교자원운동을 펼쳤던 이 두 사람은 당시에 목사가 아닌 20대 청년이었다.

(3) 78-79쪽에서 저자는 펜윅에게 선교적 영향을 미친 “와일더 형제”를 로버트 와일더의 아버지인 로열 와일더(Royal Wilder) 목사(인도 선교사)로 보고 있다. 하지만 “와일더 형제”는 로버트 와일더가 맞다. 왜냐하면, 당시 로열 와일더는 자신의 아들이 대학교를 순회하면서 선교자원운동을 펼치기보다는 자신의 선교잡지 출판사역을 맡아주기를 바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버트 와일더 역시 인도 선교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인도에서의 경험을 이미 무디의 수련회에서 강연함으로써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4) 88쪽과 188쪽에서 저자는 제중원(초기에는 광혜원)을 “국립병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서울대학교(국립병원)와 연세대학교(선교병원)가 여전히 논쟁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필자가 보기에는 ‘왕립병원’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둘째, “부흥”이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개념상의 혼란이 보인다.

하디가 한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부흥이다. 그런데 저자는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개념을 포괄하거나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특히 “부흥운동”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먼저, “부흥”을 교회의 성장과 번영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276쪽에서는 부흥을 성장과 동의어로, 277쪽에서는 “부흥과 성장,” 그리고 310쪽에서는 “부흥이나 성장”이라고 표현하고, 438-439쪽에서도 “부흥, 성장”, “부흥과 성장”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347쪽에서는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 규모가 커지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신도와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이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원산 부흥을 “거룩한 회심운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373쪽에서 하디가 윤성근에 관해 기술한 영어 원문을 번역하면서 저자는 ‘prosper’(번영)를 “부흥”으로 번역하였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오직 교회가 부흥되기만 바랐습니다.”(He loved the Church, and his whole desire was to see it prosper.)

 

그러나 필자의 이전 연구[“하디의 회개, 부흥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선교신학」 제32집(2013): 175-199]에서 이미 밝혔고, 1923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2월 부흥회 주제가 “성령세례”였듯이, 부흥은 회심(conversion)이나 교회성장(church growth)이 아니라 바로 “성령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의미한다. 특히 ‘부흥운동’(revival movement, Revivalism)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이전의 다른 연구[“원산부흥, 일반부흥인가, 대부흥인가” 「한국교회사학회지」 제34집(2013): 253-283]에서 밝혔듯이, ‘부흥’과는 전혀 다른 “전문적인 대중전도”(professional mass evangelism)(에드윈 오르, Edwin Orr) 또는 “부흥 혹은 회심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안 머레이, Iain H. Murray)으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디가 말하는 부흥은 교회성장이나 회심을 위한 전도운동을 의미하지 않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경험한 기존 신자들에게 “성령의 부으심” 또는 “성령세례”가 임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성화된 삶을 살아가며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 있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부흥에 관한 용어를 사용할 때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일반부흥과 대부흥의 차이, 그리고 원산 부흥과 평양 부흥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 관한 필자의 연구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셋째, 네비어스 선교방법에 관한 하디의 입장을 서술한 부분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저자는 358-359쪽에서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 이후에 토착인에 의한 전도활동(self propagation)과 자립운영(self support)을 언급하면서 “네비어스 선교방법”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네비어스 선교방법론은 감리교에서 채택한 선교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디와 연관 짓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하디가 행한 일에 네비어스적 방법론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디가 네비어스의 방법론을 따랐다고 말하기는 어렵기에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관해서는 최근에 발표한 필자의 연구[“한국선교 초기 감리교와 장로교의 교회성장 비교연구”, 「선교신학」 제64집(2021): 166-192]를 참고하기 바란다.

 

은퇴 이후에도 끊임없는 연구와 저술로 한국교회사 분야의 대가의 면모를 보여준 이덕주 교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많은 후속 연구가 이어져 선교사의 역할모델로서의 하디 선교사, 그리고 한국 대부흥의 도구로 쓰임받은 하디 선교사에 관한 재조명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김칠성|드류대학교에서 신학석사(M.T.S)를, 애즈베리신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교회 130년 역사에 묻고 미래에 답하다』,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이상 공저) 등이 있다. 목원대학교에서 선교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사상 2022년 2월호 (172~177페이지)

 

http://www.miral.co.kr/wp-content/uploads/2015/02/logo_onepage_portfolio_text2.png 75 340 pig790 http://www.miral.co.kr/wp-content/uploads/2015/02/logo_onepage_portfolio_text2.png pig7902022-03-17 16:03:132022-03-17 16:19:26한국교회 대부흥과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로버트 하디

유성준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를 읽고-이후정 총장(감신대)

2022년 1월 21일/0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미래교회의 포괄적 대안 :

 

유성준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를 읽고

 

이후정목사 (감신대 총장)

 

그동안 세이비어교회 사역의 소개를 통해 한국 기독교에 많은 독자층을 가져온 유성준교수는 이번에 전적으로 새로운 포맷 속에 귀중한 노고와 함께 쌓아온 연륜과 경험을 담아 우리에게 선사하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온 것을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추천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평을 하려고 한다.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오던 때,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에 대해 조선의 백성들은 가히 폭발적으로 반응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 위험하다고 여긴 조정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통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독교가 확산되던 조선 말기, 조정이 사상적·철학적·종교적 통제력을 상실한 때에 기독교는 대중적 포교를 앞당기게 되었다.

 

조선 말기,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급속히 놀랍게도 전파된 것은 기독교에 대한 백성들의 열렬한 기대어린 반응과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단순한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시대를 선도하고 개혁하는 삶의 이정표였고 방향타였다. 특히 교회가 가진 평등성의 가치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변혁과 희망으로 가는 도약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교회는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교리 아래 많은 학교를 세워 차별 없이 배우도록 하고, 병원을 지어 아픈 이들을 치료했다. 이와 같은 만인의 평등성과 교육 및 의료선교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후 100년 넘게 지나온 한국기독교의 역사에 있어 크나큰 성장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평등성의 가치가 무색하게 교회에서는 섬김의 직분이라는 본질보다는 위계적 구조가 앞섰고, 교회의 진정성이 교인 수와 물질의 증대인 것처럼 외적 성장에 몰두했으며, 미신·광신·이단 등 잘못된 형태들로 성찰적인 신앙의 성숙을 외면했다.

 

그 결과 작금의 기독교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존귀함과 주체적 가치의 함양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사회적 공신력은 바닥에 떨어지는 실망을 가져왔다. 교회가 고유한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 시대와 사회에 소망을 주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기관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는 아픔도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코로나 19가 시작되고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몇몇 개신교가 보여 준 비이성적이며, 반사회적인 모습은 ‘개체교회 중심주의와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사회의 손가락질을 불러왔고, 불일 듯 타오르는 교회의 위기상황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믿는 자여 어이 할꼬”라는 찬양의 가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탄식처럼 터져 나오는 시대적 상황 가운데, 예언자적 내용을 담은 “유성준 교수의 새로 쓴 ”세이비어 교회 이야기”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 사람들이 열광하던 시대에 창출되었던 ‘진정한 교회(Authentic Church)’로서 갖추어야 할 원리와 요소들, 나아가 삶의 방법론과 실천 매뉴얼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 핵심내용을 정리해 본다면,

 

첫째, 균형성이다. 즉 영성과 사역의 균형이다. 이를 내적 여정(Inward Journey)과 외적 여정(Outward Journey)이라고 칭한다. 존 웨슬리는 궁극적인 목표를 예수그리스도의 대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Loving God and Neighbor)에 두고, 이를 위해 경건의 훈련(Works of piety)과 자비의 훈련(Works of mercy)을 실천했다. 이것이 세이비어교회의 핵심 목회철학인데, 참되고 진정한 내적 여정은 이웃과 사회를 향한 외적 여정으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피력하면서 다양한 실천방법들을 제공한다.

 

둘째, 다양성이다. 매우 다채로운 사역의 실천이다.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은총만이 복음의 진리이나, 그것을 잘못 전개한 결과 이분법적 절연에 치우쳐, 사회구원을 살피지 못하고 개인구원에 치중한 모습이 이 시대 한국교회의 주된 약점이 되었다. 세이비어교회는 내적 여정(Inward Journey)과 외적 여정(Outward Journey), 그리고 함께하는 여정(Journey Together)을 걷는다.

 

사역(Ministry)의 어원은 빼는 것(minus)을 함의하는데, 내가 없어지고, 비워지는 것이다. 세이비어교회의 대표적인 사역들은 토기장이 집 카페, 서번트 리더십 학교, 데이스프링 침묵기도 수양관, 노숙자병원 그리스도의 집과 카이로스의 집, 빈민주거사역-새 공동체 교회 등이 있다. 사역을 행하는 공동체는 10개로 흩어져 믿음과 섬김으로 함께하는 여정(Journey Together)을 걷는다. 생명의 빵 교회, 데이스프링 교회, 제8일 신앙공동체, 축제교회, 예수님의 친구들 교회, 희년교회, 새 공동체 교회, 구도자교회, 그리스도의 집, 그리스도의 교회, 지금 즉시 등이다.

 

셋째, 구체성이다. 수많은 사역들이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믿음과 열정으로 섬기는 사역에 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계화된 사역의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의 집-노숙자 병원, 카이로스의 집-노숙자병원과 연관된 재활 프로그램, 데이스프링 침묵기도 수양관, 믿음과 재정 네트워크, 어린이 사랑모임-양부모 사역, 희년 주거사역, 희년 직업소개 사역, 토기장이의 집 카페, 사마리아 주거 사역-중독사역, 시타 예능센터-빈민청소년 예능사역, 회복 카페 등 매우 고귀한 세이비어교회의 구체적인 사역 매뉴얼을 담고 있다.

 

넷째, 적용성이다. 이 책은 독특한 교회 한 곳을 단순히 알리는 정보에 그치지 않고, 다각적인 아이디어(Idea)와 프로토타입(Prototype)을 제공한다. 특히 ‘섬김’과 ‘종, 노예’를 의미하는 ‘서번트(Servant)’는 이제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함양하고 체계화해야 할 고유성과 필연성의 가치이다. 서번트를 각자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 맞게 적용과 실천을 모색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목회, 사역의 자리를 넉넉히 갱신하고 혁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방향성이다. 사변적인 이론에 그치지 않고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실제적인 이정표를 발견하게 한다. 단어, 문장, 문단 하나하나 정독하고 곱씹으며, 성찰하고 계획한다면, 이 책은 감추어진 보물과 값진 진주가 될 것이다. 코로나 시국이 지속되면서 교회가 처한 엄청난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 나라와 진정한 교회를 회복하고 맛보며 누리기 위해 이 책의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을 것을 확신한다. 시기적절하게 아주 좋은 책을 저술하여 한국 개신교에 또 한번의 경종을 울려준 유성준 교수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앞으로 이 책이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 신학도들, 나아가서 일반 평신도 등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을 믿고 소망하며 서평을 대한다.

 

http://m.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847

이후정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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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조현이만난사람

2021년 10월 27일/0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하나님 ‘떠나라’ 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짬] 자전 에세이 펴낸 홍인식 목사

지난해 순천중앙교회 담임을 사퇴하고 목회 현장을 은퇴한 홍인식 목사가 지난 6일 인터뷰에서 자전적 신앙고백서 <엘 까미난떼>를 쓴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홍인식(65) 목사는 밝고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이사장으로서 차별금지법 폐지를 주장해도, 보수 목사들조차 명랑한 그의 얼굴을 보면 험한 말을 접기 일쑤다.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멕시코, 한국 등을 떠돌며 산 방랑자의 낭만과 자유와 여유를 대하면 상대방도 완고한 무장이 해제되기 마련이다. 최근 스페인어로 ‘걷는 자’란 뜻의 책 <엘 까미난떼>(신앙과지성사 펴냄)에서 명랑한 겉모습과 달리 아픈 어린 시절까지 고백한 그를 지난 6일 서울 공덕동의 한 교회 카페에서 만났다.

스페인어 걷는 자 ‘엘 까미난떼’ 출간

부모 이혼·더부살이·남미 이민 등

성공·부자 갈망했던 성장기 아픔 첫 고백

한국인 최초 ‘해방신학’ 박사학위 받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등등

10차례 ‘꽃방석’ 자리 버리고 자유롭게

 

신앙과지성사 제공

 

홍 목사는 20대 때 신학대학원생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했던 영락교회에 전도사로 들어갔다. 이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주목받던 한인교회에서, 50대엔 서광선 이화여대 교수·한완상 서울대 교수·이삼열 숭실대 교수 등이 활동했던 서울 압구정동 현대교회에서, 올 초까지는 전남 순천의 장자교회인 순천중앙교회에서 각각 목회 활동을 했다. 그는 그런 ‘꽃방석’을 언제나 임기나 정년도 채우지 않고 박차고 나갔다. 지위에도 돈에도 매이지 않고 언제나 떠났다. 그쯤은 놓고 떠나도 뭔가 유복한 뒷배경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가 생애 처음으로 <엘 까미난떼>에서 고백한 삶은 ‘유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만 7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짐을 싸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빠 집으로 옮겼다. 엄마 집을 떠나는 차에서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리며 조약돌로 표시도 해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엄마 집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잃지 않으려 뇌리에 박았던 창 밖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아빠가 새엄마와도 이혼해 다시 짐을 쌌다. 옮긴 곳은 아빠를 ‘오빠’라 불렀으나 혈육은 아닌 ‘고모’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더부살이 5년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비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20일간 등교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전교 1·2등을 했지만 학교에서 쫓겨나던 날의 설움과 모욕감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어머니·누나·여동생과 함께 파라과이로 농업 이민을 떠났다. 가난을 벗어나려 고국을 떠나는 날, 너무도 울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도 기어코 성공해서 가난에 보복하겠다는 마음만은 굳건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파라과이에서 고교를 다니며 옷행상과 옷가게를 했고, 아순시온국립대학 경영학과에서 성공과 부자의 꿈을 키웠다.

그런 그가 한국인 최초의 ‘해방신학’ 목사가 됐다. 해방신학은 혼자 잘 사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1960년대 이래 남미에서 독재자들과 다국적기업의 부도덕에 맞서 로메로 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게 해방신학이었다. 그래서 해방공간 북에서 공산당에 의해 박해받고 남하해 친미·친독재의 길을 걷던 월남자들이 세운 영락교회를 비롯한 주류 교회의 보수적 크리스천들에 의해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비롯한 진보는 ‘빨갱이’로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북한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땅과 재산을 빼앗기고 남하한 아버지를 둔 그가 영락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해방신학자가 되리라곤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홍 목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방신학과 달리 마치 성령론자처럼 고백했다. 파라과이 한인교회의 환송을 받으며 “목사가 되어 다시 남미로 돌아오겠다”고 했던 그는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형교회인 영락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교인들을 심방할 때마다 신자들이 여비 봉투를 줘서 주머니는 늘 두둑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짝사랑했던 여성과 결혼해 ‘토끼 같은’ 아이들까지 생겼다. 가난한 파라과이로 돌아간다는 약속 같은 건 곧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미아리 산동네에서 할머니 권사가 봉투도 없이 꼬깃꼬깃한 5천원 지폐를 주었다. 마지못해 받긴 했지만 ‘내가 거지인가. 이따위 적은 돈을 주다니’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순간 머릿속에 뚜렷한 음성이 들렸다. ‘이가봇, 내가 너를 떠났다’는 성경 구절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소리에, 하나님이 아닌 봉투를 믿는 나를 발견하고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뒤 그는 짐을 싸 파라과이로 떠났다. 그곳에서 목회를 하다 몇년 뒤 아르헨티나로 옮겨 목회를 했다. 거기서 체 게바라의 친구인 세계적인 개신교 해방신학자 호세 미게스 보니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해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교수 겸 목사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잘 나가는 신성교회 담임을 할 때였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한인장로교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 지인이 그를 처음 만나는 목사에게 “아르헨티나에서 온 홍인식 목사님입니다”라고 소개했다.

“내가 그냥 목사인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목사고, 박사에 교수까지 하고 있는 성공한 목사라고 소개해야지, 그따위로 소개하다니’란 생각에 불쾌해하며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다시 ‘떠나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신성교회를 떠나 남미에서도 가장 열악한 공산국가 쿠바로 가 5년간 신학대학 교수를 했다. 이후 칠레에서도, 서울 현대교회에서도, 멕시코 신학대에서도, 전남 순천중앙교회에서도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다. 무려 10차례 뒤돌아보지 않고 ‘엘 까미난떼’가 됐던 그는 말했다.

‘신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신을 믿느냐’가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돈, 지위, 이데올로기, 명예를 믿은 건 아닌지…. 남미에서 평생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와 함께하며 군부 독재자에게 죽임까지 당하는 해방신학자에 비하면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14602.html#csidx2743552ce481a129656a07e3e891a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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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하디 –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자, 원산의 기적이 시작됐다

2021년 9월 2일/0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자, 원산의 기적이 시작됐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입력 2021.09.01 03:00)

로버트 하디 선교사

 

“하디 선교사가 수없이 ‘회개하라’고 할 땐 아무 반응이 없던 교인들이 ‘저부터 회개합니다’ 하자 기적처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무려 1200쪽에 육박하는 ‘영(靈)의 사람, 로버트 하디’(신앙과지성사)를 최근 펴낸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은퇴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 출신 감리교 의사 선교사로 1890년 조선에 온 하디(1865~1949)는 선교사, 신학 교육자, 신학 교재 60여 권을 쓴 저술가로 평생 한국 복음화에 헌신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을 이끈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원산 부흥 운동은 4년 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평양 대부흥’의 도화선이 된 사건. 그러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도 하디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03년 하디 선교사의 회개운동 이후 원산교회는 부흥했다. 새 건물을 짓고 기념촬영한 모습.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에 따르면 하디는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회개’가 뭔지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원산 부흥 운동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하디는 1902년 무렵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한국 선교 13년째, 원산 부임 10년째인 이때까지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인 집을 불시에 방문해 보니 술상을 놓고 교인 모임을 하고 있었고, 교인을 빙자한 횡령·사기 사건도 빈발했다. 하디는 ‘세례 교인’을 ‘학습 교인’으로 강등시키고 ‘제명’ ‘무기한 (예배) 출석 금지’ 조치도 내렸다. 선교 보고서에 “원산 교인들의 영적(靈的) 상태는 대단히 실망스럽다”고 적을 정도였다.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 내 로버트 하디 가족묘 앞에서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전기 쓴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극적 반전이 일어난 것은 이듬해인 1903년 여름. 휴가철을 맞아 외국인 선교사들이 휴양지 원산에 모여 기도회와 성경 공부 모임(사경회)을 열었다. 최고참 선교사 하디가 설교를 맡게 됐다. 그는 문득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모태 신앙이었지만 진정한 믿음이 없었고, 조선 교인들을 오만과 교만으로 대했음을 통회(痛悔)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 그동안 ‘조선 교인 탓’을 하던 하디가 ‘내 탓’이라고 고백하자 다른 외국인 선교사에 이어 조선 교인들로 회개의 불길이 번졌다.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갚지 않은 돈을 갚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졌고, 20년 전 본의 아니게 더 받은 봉급을 반환하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그 이전까지 ‘회개’는 무슨 뜻인지 감(感)도 못 잡던 조선 교인들이 비로소 회개의 참뜻을 알게 된 것이다. 부흥의 불길은 이내 원산에서 서울, 개성 그리고 평양으로 확산했다. 그 결과 불과 10여 년 후인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의 절반 이상을 개신교인이 차지할 정도로 개신교가 이 땅에 탄탄히 자리 잡게 됐다.

 

하디 선교사 부부(오른쪽)와 애비슨 선교사 부부. 하디 선교사는 좀처럼 웃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는 하디의 삶을 통해 개신교가 조선에 전해져 뿌리 내리는 과정을 꼼꼼히 재구성했다. 그는 “원산 부흥 운동의 본질은 ‘물질적 성장’이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본질적 변화였기에 가능했다”며 “코로나 시대를 맞은 한국 교회도 하디의 삶을 통해 무엇이 우선이고 본질인지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1949년 사망한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묘비. /신앙과지성사

 

2023년 원산 부흥 운동 120주년을 앞두고 하디 선교사의 전도로 세운 간성·강릉중앙·광희문·석교·수표교·양양·종교교회가 ‘하디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교) 본부와 감리교신학대가 평전 발간에 뜻을 모았다.

http://bit.ly/3gQCD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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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하디 -출판기념회

2021년 8월 28일/0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힘과 능이 아니라 성령으로 회개한 하디 본받아야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 출판감사예배

◇ 이철 감독회장
◇ 이철 감독회장

 

하디기념사업회(회장 최이우 목사)가 하디 선교사의 원산대부흥운동 120주년(2023년)을 앞두고, 그의 삶과 신앙이 담긴 전기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신앙과지성사)를 출판하고, 지난 8월 24일 대한기독교감리회 선교국, 역사보존위원회와 공동주최로 서울시 종로구 종교교회 나원용홀에서 출판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날 행사는 오일영(기감 선교국) 총무의 사회로 차재일(광희문교회) 목사의 기도, 조선석(양양교회) 목사의 성경봉독, 이철 감독회장의 설교와 서승환(종교교회 찬양대지휘자) 교수의 축가로 진행됐다. 이어 최이우(하디기념사업회 회장) 목사의 경과보고와 윤경로(전 한성대 총장) 박사의 서평, 이후정(감신대 총장) 목사의 축사, 이덕주(전 감신대) 교수의 저자인사 시간을 가진 뒤, 안정균(감리교역사보존위원회 위원장) 감독의 축도로 마무리했다.

이철 감독회장은 “내 안에 거하라!”(요 15:7)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하디는 선교하면서 바른 목적을 가지고 열정을 다했지만, 왜 어렵고 잘 풀리지 않는가에 대한 원인을 한국 사람이나 환경 등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았다. 이 사건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새로운 영적 부흥을 이 땅에 가져온 것이다.”라고 말하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는 어려움의 해결 방법도 하디의 깨달음과 실천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최이우 회장
◇ 최이우 회장

 

하디기념사업회 회장 최이우(종교교회) 목사는 경과보고를 통해 “1907년 평양 산정현교회 사경회도 하디의 1903년 부흥운동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며, “하디를 통해 한국 땅에서 일어난 놀라운 역사를 우리 세대뿐 아니라 후손들이 오래오래 기억하고 유산으로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전기를 펴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10년 전 하디에 대한 책을 내고, 턱없이 적은 분량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이덕주 교수는 “대한항공 토론토지부장을 역임한 연동교회 강사겸 집사가 캐나다 선교사 게일과 하디의 고향을 방문하는 답사여행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운영한다며 동행을 요청해 다녀오게 됐다.”고 밝혔다. 그 뒤 “하디 전기 쓰셔야 됩니다”라는 박동찬(일산광림교회) 목사와 장이려(속회연구원) 목사의 강권 속에 밀린 숙제로만 안고 있다가, 하디기념사업회의 청탁을 받아 전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

이 교수는 ‘영의 사람’이라는 책의 제목은 “하디 선교사님이 원산부흥운동 이후에 은퇴할 때까지 항상 암송했던 성경구절 스가랴서 4장 6절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에서 따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디 선교사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이 그분이시다. 그리고 하디가 이 땅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분이 나 같은 머슴을 쓰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라며, 하디를 오늘날 한국에서 부활시킨 이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 이덕주 교수
◇ 이덕주 교수

 

책을 펴낸 신앙과지성사 대표 최병천 장로는 “단일 전기로는 가장 방대한 분량(1,200여 쪽)의 책으로, 사진자료는 물론 하디 가족의 무덤이 표기된 지도도 함께 실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캐나다 Michcal Danagher 대사의 축하 편지도 소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한편, 하디기념사업회는 2019년 12월 하디 선교사가 세운 교회(간성교회, 강릉중앙교회, 광희문교회, 석교교회, 수표교교회, 양양교회, 종교교회)와 감리교신학대학교(이후정 총장)를 중심으로 첫 모임을 가졌다. 초대회장으로 황광민 목사를, 첫 사업으로 하디 전기 발간을 결정했다. 2020년 1월, 2차 모임에서 공식명칭을 하디기념사업회로 정하고, 2021년(5월) 2대 회장으로 최이우(종교교회) 목사를 선임했다.

이연경 기자 cnews1970@naver.com

bit.ly/3mGFhU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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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이덕주 지음

2021년 8월 28일/0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힘과 능이 아니라 성령으로 회개한 하디 본받아야

    • 기자명 이연경 기자
    • 승인 2021.08.25 15:43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 출판감사예배

◇ 이철 감독회장
◇ 이철 감독회장

 

하디기념사업회(회장 최이우 목사)가 하디 선교사의 원산대부흥운동 120주년(2023년)을 앞두고, 그의 삶과 신앙이 담긴 전기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신앙과지성사)를 출판하고, 지난 8월 24일 대한기독교감리회 선교국, 역사보존위원회와 공동주최로 서울시 종로구 종교교회 나원용홀에서 출판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날 행사는 오일영(기감 선교국) 총무의 사회로 차재일(광희문교회) 목사의 기도, 조선석(양양교회) 목사의 성경봉독, 이철 감독회장의 설교와 서승환(종교교회 찬양대지휘자) 교수의 축가로 진행됐다. 이어 최이우(하디기념사업회 회장) 목사의 경과보고와 윤경로(전 한성대 총장) 박사의 서평, 이후정(감신대 총장) 목사의 축사, 이덕주(전 감신대) 교수의 저자인사 시간을 가진 뒤, 안정균(감리교역사보존위원회 위원장) 감독의 축도로 마무리했다.

이철 감독회장은 “내 안에 거하라!”(요 15:7)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하디는 선교하면서 바른 목적을 가지고 열정을 다했지만, 왜 어렵고 잘 풀리지 않는가에 대한 원인을 한국 사람이나 환경 등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았다. 이 사건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새로운 영적 부흥을 이 땅에 가져온 것이다.”라고 말하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는 어려움의 해결 방법도 하디의 깨달음과 실천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최이우 회장
◇ 최이우 회장

 

하디기념사업회 회장 최이우(종교교회) 목사는 경과보고를 통해 “1907년 평양 산정현교회 사경회도 하디의 1903년 부흥운동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며, “하디를 통해 한국 땅에서 일어난 놀라운 역사를 우리 세대뿐 아니라 후손들이 오래오래 기억하고 유산으로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전기를 펴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10년 전 하디에 대한 책을 내고, 턱없이 적은 분량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이덕주 교수는 “대한항공 토론토지부장을 역임한 연동교회 강사겸 집사가 캐나다 선교사 게일과 하디의 고향을 방문하는 답사여행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운영한다며 동행을 요청해 다녀오게 됐다.”고 밝혔다. 그 뒤 “하디 전기 쓰셔야 됩니다”라는 박동찬(일산광림교회) 목사와 장이려(속회연구원) 목사의 강권 속에 밀린 숙제로만 안고 있다가, 하디기념사업회의 청탁을 받아 전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

이 교수는 ‘영의 사람’이라는 책의 제목은 “하디 선교사님이 원산부흥운동 이후에 은퇴할 때까지 항상 암송했던 성경구절 스가랴서 4장 6절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에서 따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디 선교사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이 그분이시다. 그리고 하디가 이 땅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분이 나 같은 머슴을 쓰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라며, 하디를 오늘날 한국에서 부활시킨 이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 이덕주 교수
◇ 이덕주 교수

 

책을 펴낸 신앙과지성사 대표 최병천 장로는 “단일 전기로는 가장 방대한 분량(1,200여 쪽)의 책으로, 사진자료는 물론 하디 가족의 무덤이 표기된 지도도 함께 실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캐나다 Michcal Danagher 대사의 축하 편지도 소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한편, 하디기념사업회는 2019년 12월 하디 선교사가 세운 교회(간성교회, 강릉중앙교회, 광희문교회, 석교교회, 수표교교회, 양양교회, 종교교회)와 감리교신학대학교(이후정 총장)를 중심으로 첫 모임을 가졌다. 초대회장으로 황광민 목사를, 첫 사업으로 하디 전기 발간을 결정했다. 2020년 1월, 2차 모임에서 공식명칭을 하디기념사업회로 정하고, 2021년(5월) 2대 회장으로 최이우(종교교회) 목사를 선임했다.

이연경 기자 cnews19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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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설 목사가 쉽게 쓴 전도와 문화목회 이야기

2021년 3월 26일/2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 진지한 기독교인,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목회자라면 한번쯤 고민해 보았을 문제들을 집요하고 논리적으로 파고 든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는 지금 교회의 감추고 싶은 민낯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특히 한국교회가 그렇게 주장하고 강조했던 전도 방식에 대한 냉철한 비판은 과거를 부정 당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런데 꼬인 실타래가 서서히 정리되는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은 비판에 그치지 않고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안이 이론에서 그치지 않고 저자의 목회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 맺은 열매라는 점에서 새로운 눈을 열게 한다.
    복음은 불변하지만 복음을 담아내는 문화라는 옷은 시대에 걸맞아야 한다. 그 옷을 어떻게 입혀야 하는지 알려준다. 기독교인끼리 좋은 교회가 아니라 비기독교인도 칭찬하는 교회의 이야기라 더 실제적인 적용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도 많아 좋다.

    *교보문고에 실린 책 리뷰 https://bit.ly/3cZby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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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94세 신학자 “내 묘비명엔 사망 아닌 부활 날짜 새길것”

2020년 12월 9일/0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獨 94세 신학자 “내 묘비명엔 사망 아닌 부활 날짜 새길것”

몰트만 책 ‘나는 영생을 믿는다’ 제자 이신건씨가 번역해 출간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그는 최근 번역 출간된 '나는 영생을 믿는다'에서 부활의 희망을 강조한다. /신앙과지성사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그는 최근 번역 출간된 ‘나는 영생을 믿는다’에서 부활의 희망을 강조한다. /신앙과지성사

올해 94세 노(老)신학자가 제자에게 물었다. “내 비석에 무슨 글을 새길지 아느냐.” “출생일과 사망일이겠죠.” “아니, 출생과 부활의 날짜다. 내가 죽은 날에 나는 부활할 것이다.”

독일의 저명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작년 한국을 찾았을 때 제자 이신건과 나눈 대화다. 최근 이씨의 번역으로 출간된 ‘나는 영생을 믿는다’(신앙과지성사)는 노신학자의 삶과 신앙, 신학이 녹아있다.

몰트만 박사의 일생은 20세기 독일 현대사와 겹친다. 청년 땐 나치에 징병돼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영국군 포로 생활도 했다.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스코틀랜드의 포로수용소에서였다고 한다. 종전 후 괴팅엔대 신학부로 진학해 개신교 신학을 전공했다. 국내에도 ‘희망의 신학’ 등 저서가 소개됐다.

 

위르겐 몰트만 박사의 저서 '나는 영생을 믿는다'
                                                             위르겐 몰트만 박사의 저서 ‘나는 영생을 믿는다’

 

스스로 ‘마지막 책이 될 것’이라고 밝힌 ‘나는 영생…’에선 90대에 접어들어 상처(喪妻)한 후 느끼는 쓸쓸함도 감추지 않는다. “나의 아내 엘리자베트가 2016년에 사망한 이래 나의 관점은 바뀌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나에게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또 책을 쓴 목적을 ‘죽음의 기술’이 아니라 ‘부활의 기술’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죽음의 기술은 우리가 오직 한 번만 실천할 수 있지만, 부활의 기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실천할 수 있다”고 적었다.

책은 예수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죽음 후에도 생명은 존재하는가?’ ‘영원한 생명: 우리는 무엇에 대해 질문하는가?’ ‘우리는 죽는 순간에 부활할 것이다’ ‘살아있는 영혼의 죽음과 깨어남’ 등으로 이어지며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 ‘시간의 매 순간은 미래의 시작이다. 그리고 과거는 원래 지나간 미래다. 출생이 죽음보다 앞서듯이, 미래는 과거보다 앞선다’ ‘영원한 안식은 영원한 죽음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등 잠언 같은 구절도 즐비하다.

몰트만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조상 숭배는 뒤를 향해 ‘시조(始祖)’들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해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하나님의 미래 세계의 생명을 지시한다”며 “이 미래의 희망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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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신학자가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전한 메시지는… [출처] – 국민일보

2020년 12월 9일/61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老신학자가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전한 메시지는…

나는 영생을 믿는다/위르겐 몰트만 지음/이신건 옮김/신앙과지성사

위르겐 몰트만 박사(오른쪽)가 2012년 5월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강연하고 있다. 옆은 그의 제자이자 ‘나는 영생을 믿는다’ 번역자인 이신건 목사. 신앙과지성사 제공

‘희망의 신학자’ 독일 튀빙겐대 명예교수 위르겐 몰트만(94) 박사가 전 세계 독자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자 한 이야기는 ‘영생’이었다. 몰트만 박사는 최근 스스로 “내 마지막 저서”로 명명한 책 ‘나는 영생을 믿는다’(신앙과지성사)를 펴냈다. 20세기 후반 현대신학계를 개척한 인물로 꼽히는 몰트만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에 팽배했던 ‘실존주의 신학’ 대신 ‘희망의 신학’을 주창해 주목을 받았다.

그가 죽음과 영생, 부활을 깊게 성찰한 이 책을 펴낸 계기는 2016년 아내의 별세였다. 책은 자신처럼 가족 친지 등의 죽음을 맞은 이들에게 부활의 희망과 확신을 전하기 위해 썼다. 학술적 논문은 아니지만, 그간 주창해온 신학이론이 녹아있다. 그 역시 고령이기에 죽음을 신학적으로 고찰한 이번 작업이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몰트만 박사는 “보이는 이 세계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세계에 죽은 자들이 존재해 있다고 믿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후에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개인의 부활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인식했다. 다만 부활의 형태에 있어선 예수와 다를 거라고 봤다. 예수는 그의 무덤에서 육체로 부활했으나, 인간은 죽는 순간 영생으로 부활한다는 게 몰트만 박사의 견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낱알이 땅에서 썩어야 꽃이나 나무를 피워내듯이 우리의 신체 역시 죽음을 거쳐 썩지 않은 영생을 얻는다. 독일 나치정권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역시 이런 영생의 소망을 품었다. 본회퍼 목사는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동료 수감자에게 “이것이 마지막이지만, 내게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몰트만 박사는 “우리가 ‘영혼의 어두운 밤’이나 육신의 고통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 곁에 계신다. 그리스도는 겟세마네와 골고다 사이에서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저주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며 “그리스도의 지옥행 이래 모든 희망이 사라진 곳에도 희망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홀로코스트, 핵전쟁, 기후위기 등 제2차 세계대전부터 지금껏 불거진 인류의 악을 열거한 뒤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대한다”며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부활을 고대한다.

“인생은 온통 허무할 뿐이고, 죽음 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도 오직 허무가 아닌가. 그러나 몰트만은 외친다. ‘아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해도, 희망만은 포기하지 말자!’”

몰트만 박사의 제자로 이 책을 번역한 이신건 목사의 헌사다. 코로나19 시대에 죽음과 절망으로 쓰러진 인류에게 보내는 노신학자의 마지막 당부같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67864&code=23111312&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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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장손 손명원 장로, 감신대에 『손정도』전기 1600권 기증 감신대, 1찬만원 고료 ‘『손정도』독후감 대회 개최

2020년 9월 16일/0 코멘트/카테고리: 보도자료 /작성자: pig790

▲ 감신대가 ‘『손정도』전기를 기증한 손정도 목사의 장손 손명원 장로에게 15일 감사패를 전달했다. 좌로부터 이후정 총장, 손명원 장로 신앙과지성사 최병천 장로, 이현주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손정도 목사의 전기를 담은 책 ‘『손정도』 – 자유와 평화의 꿈(이덕주 지음)’ 1600권을 학교에 기증한 손명원 장로(79세)와 책을 펴낸 신앙과지성사 최병천 장로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손명원 장로는 해석 손정도 목사의 장손이자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며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손원일 제독의 장남이다. 현대중공업 부사장, 현대미포조선 사장, 쌍용자동차 사장, 맥슨전자 사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손컨설팅컴퍼니의 대표이사를 맡는 등 경영인의 삶을 살았다.

감신대는 손명원 장로가 기증한 책을 전교생들에게 나눠주고 독후감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후정 총장은 “감신대 학생들이 이 기회를 통해 손정도 목사님의 생애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갔던 손정도 목사님처럼 감신의 모든 학생들이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원한다”고 말했다.

감신대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손정도』전기 독후감 대회는 오는 2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응모 할 수 있다. 우수상(자유와 평화상) 1명에게 3백만원의 상금을 수여하는 등 총 1천만원 상당의 상금과 응모한 모든 학생에게 신앙과지성사가 발간한 3만원 규모의 도서를 지급한다.

손명원 장로도 “이번 독후감 대회를 통해서 학생들이 손정도 목사의 삶을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분의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 그리고 걸레정신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 손명원 장로

 

 

해석 손정도(1882~1931)

상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는 그 활동 반경이 실로 광대하였다. 국내에서는 출생지 강서에서 출발해서 평양, 서울을 거쳐 ‘가츠라암살음모사건’으로 1년 유배 생활을 했던 전라도 진도까지 2천 리 길이었다. 그는 예수를 믿고 부모와 고향에서 쫓겨난 이후 ‘27년 공생애’의 반 이상(15년)을 해외에서 살았다. 중국 남방 상해에서 북경과 산해관을 거쳐 북방 갈림과 하얼빈까지 1만 리 길이었다.

그는 그렇게 광활한 지역을 누비면서 목사로만 산 것이 아니라 선교사로, 독립운동가로 살았다. 그 과정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은 도산 안창호와 우남 이승만을 비롯해서 전덕기, 양기탁, 이동휘, 이시영, 이동녕, 안태국, 김규식, 여운형, 김구, 노백린, 신규식, 현순, 하란사, 기마리아, 김활란, 유관순 등 그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사와 근대사의 주역들로 교과서에서 읽었던 인물들이었다.

손정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가족의 투쟁 또한 눈물겨웠다. 삼일운동 때 평양에 있던 부인과 자녀들도 모두 만세시위에 가담했고 어머니(오신도)와 맏딸(손진실)과 함께 평양 애국부인회를 조직해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손정도의 두 아들(손원일과 소원태) 역시 일제말기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손정도는 북만주 길림에서 목회할 때 ‘숭실 동문’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김일성)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일이 있었다. 그 일로 김일성은 손정도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렇게 해서 손정도는 ‘남과 북에서 공히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처럼 손정도는 그 인맥과 활동이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한반도를 관통하고 있는 백두대간처럼 응대하였다.(이덕주 교수의 『손정도』 머리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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